결혼해줘요.
글쎄, 결혼하지 않아도 이렇게 함께 살면 되잖어?
결혼을 해야 더욱 행복해지잖아요.
민들레 홀씨처럼 품 안에 담박 내려앉아서는 고집부리던 녀석. 아빤 진작 결혼을 했다고 해도 또 해달라고 졸라서 실소를 짓게 하질 않나. 입 안에 사탕이라도 굴리면 손가락으로 기어이 빼가던 녀석을,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건 자라니 당최 말을 들어 먹어야지. 제 오빠가 더러 무대뽀 기질을 보이는지라 이를 걱정하는데 외려 제쳐 두어야 한다. 은근히 사고가 잦다, 것도 대형으로. 연립주택 옥상에서 지나는 차에 돌을 던져 운전자가 씨근덕거리며 올라오질 않나. 주차 차량 보닛에 버젓이 자기 이름을 써놓고 와선 물러주어야 한다. 이도 매일처럼 비까번쩍하게 닦아 놓구선 들여다 보며 만족하고, 혹여 흠이라도 생기면 차가 굴러가질 않는다고 생각하는, 여편네보다 자동차를 더 사랑하는 치 것을. 할머니를 모시고 동생네와 휴양지에 간 적이 있다. 오빠와 내내 티격태격하길래 내쫓았더니 한나절이나 없어져 속을 태우던 일이나 누워서 그냥 내질렀다는 발길질에 베란다 튼실한 이중창을 깨먹은 일 등 열거하자면 긴 겨울밤이 짧을 걸. 오죽하면 옆에서 지레 거들까.
여자애가 조신해야 하는데, 쟤 문제가 있지 않아요?
아이들이 다 그렇지. 생각이라도 돌아가니 사고를 칠 걸.
비로소 중학생이 되었다. 맞춤교복이 넉넉한 게 걸리지만 입혀 놓으니 태가 나는 걸. 출근하는데 쪼르르 쫓아와서는 쫑알거린다. 용돈도 올려달라길래 그러마 해놓은 참에, 담임선생 전화를 받았다. 은밀히 상의할 일이 있다나. 무슨 일인지 감이 안잡혀 갸웃거린다. 은밀한 상의라니, 에로틱한 상황 등을 그릴 만한 계기가 있어야지. 상상을 이으며 입을 막고 혼자 웃기도 하다가 전화기를 든다. 일과를 뿌리치고 덜렁 나갈 수 있어야지. 아이 엄마로 하여금 대신 가게 하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말했더니, 금방 목소리가 뾰족하다. 아이 아빠하고만 상의해야 한다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다가는 말을 끊는다. 하긴 얘기중에도 스스로 이상타 알아챘겠지. 거친 숨소리만 내길래, 헛기침을 보냈더니 그러세요 하며 뚝 끊어버린다. 성질머리허고는, 아이들을 다그치는 장면을 눈에 잡으며 툴툴댔다.
결국 학교에 다녀온 아이 엄마 말을 들어보니 꽤 심각한 일이기는 하다. 일진이 아이에게 붙어 있다나. 학교에서야 신경을 쓰지만 수업 끝나면 알아서 데리고 가시라는 말씀을 하더란다. 가끔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일이 이리 일어나다니. 꾸짖거나 혀만 찰 수도 없고. 쬐그만 녀석을 쫓기에는 무관심하던 게 캥긴다. 골똘히 얼굴을 보노라니 자기도 뭔가 심각한 걸 알고는 몸을 사리는 눈치이다. 그래, 당분간 지켜보마. 이끌기 나름 아닌가. 아직은 손 잡고 걸어야지. 그러다 보면 이 터널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게다. 토닥이며 웃음을 지으려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제 엄마와 늘상 부딪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한다고 울고불며 전화를 해대니. 이해해 주지 않는 부모가 원망스러운 때가 있었지. 이건 아니다 싶어도 가급적 이해하려 애써야지.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다행히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잠잠해졌다. 그렇다고 안도할 수만은 없다. 눈 들면 삶은 첩첩준령 아니던가. 새삼 점검해야지.
식구 하나 빠진 집 안이 호젓하다 못해 적막하다. 사랑 받고 싶은 표현의 발로일까. 전에 없이 아이 어리광이 심하다. 그럴 수도 있지. 한 동안 주위 관심이 아닌 감시를 받아왔으니 부담이 오죽 심했을까. 풀어주고 토닥거렸더니 그제사 헤헤거린다. 방학이라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즐기면서. 그리고는 밤중에 슬쩍 보면 새벽까지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
지방에 내려가야 하는 날, 일찍부터 서성이다가는 주저앉았다. 그렇게 당부했거늘, 늘어진 습관을 어쩌지 못한 식구들이 한밤중이다. 늦으막해서야 아침상을 차리는데, 아이와 함께 하자며 두었더니 숫제 일어날 기미가 없다. 나중에는 제 엄마가 깨워도 요지부동이니. 내심 방치하고 억누르며 빈둥거리다가 역정을 낸다. 내려가는 일은 이미 포기했다. 아이를 불러내 호통치다 보니 제풀에 끓어올라 손을 든다. 철썩하며 뺨에 손바닥이 붙어 버렸다. 옆에서 아이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얼어 붙은 세상. 조만간 날이야 풀리겠지만 당장은 답답하다. 종종걸음으로 아침 내내 눈밭을 헤매며 십리나 궤적을 남긴 오리 가족. 터전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아 버렸다. 대체 이게 뭔 변괴래? 유영도 못하고 익숙하지 못한 걸음만 떼야 하다니. 이 참에 푸득거리며 기름끼 떨어낸 날개를 펼쳐 날아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