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바트라 부르던 넥타이. 폭 넓은 목도리에서 유래하여 보 타이bow tie가 되었다가 지금과 같은 포인핸드fourinhand 형태로 낙착된 시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넥타이를 매고 나가려는데 매는 방법을 알아야지. 거울을 보며 이리 돌리고 저리 애써봐도 안된다. 간단한 듯 했는데 그것 참. 안방으로 가 보자. 얼마 전까지도 아버지는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머리 손질이나 면도 등을 하고 넥타이를 매느라고. 내 목에 걸린 넥타이를 당신이 마주 보며 직접 매려니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 결국 당신 손짓을 따라 해 본 다음에야 제대로 되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결과론부터 말하자면, 진도가 고향인 친구 얼굴이 환해졌다. 술자리에서마다 자랑스레 떠든다. 진작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기대로 매조지하면서.
이모저모를 떠올려 여러 경우의 수를 작성하고 계획을 세워 길을 내고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준비를 하면 만사형통이야 아니더라도 일이 수월하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다. 막연하게 아는 것을 더듬어도 확실치는 않고, 당연히 쫓아가 알아보아야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 사회라는 언덕을 앞에 둔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제껏 배운 바를 써먹을 수는 있으려나. 인간 됨됨이가 우선이라는 어머니 말씀에 웃음으로 답하지만 그게 덕목은 될지언정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어줍게 부딪히고 딩구는 사이에 모난 자리가 닳고 닳아 자연스레 적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넥타이가 없어서 어른 것을 맨다. 당신이야 당연히 집안에 들어앉으신지라 괜찮지만 그래도 모른다. 혹여 예식장에라도 다니시려면 필요할 텐데, 내 차지가 된 넥타이를 어떻게 맬 건가. 오래 된 것 중 폭이 좁고 색상이 옅은 것으로 골라 줄곧 매고 다녔다. 나중 내것을 장만할 때까지.
정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습관화하다 보니 사고마저 그렇게 규정지어지는 건가. 옆 동료는 답답하다며 넥타이를 매지 못한다. 근사한 풍모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이도 아닌 데에도 불구하고 케주얼 복장이다. 더부룩한 머리카락에 운동화도 가끔 뒤축을 접어 신어선 터덜터덜 소리를 내며 다닌다. 경탄스러운 건 생각이 어찌 그리 자유스러운지. 안되겠지 하고 되묻는 법이 없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이니. 회사BU장은 엄격하다. 특히 용모와 복장이야말로 정신 상태의 출발점이라 믿는 사람이다. 어쩌다가 겉멋이 든 내가 아버지의 좁고 낡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 적이 있다. 마침 중요한 회합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내 타이를 보더니 기겁한다. 사람을 시켜서는 구태여 새 넥타이를 사 오게 해서 다시 매길 원한다. 전혀 취향이 아니어서 한 번 매고 가차없이 버릴 것을. 그런 상사가 옆 동료 복장에만은 관대하니 어인 일일까. 내 양복 깃 한쪽이 접혀 있는 듯 하면 억지로 다가와 바르게 해주는 사람이 그 친구에게만은 아무 소리도 못한다.
패션트랜드가 한시가 다르게 바뀐다. 양복 깃이 넓은 게 유행이다가는 순식간에 좁아지고, 양 트임을 선호하다가는 막아버리지를 않나. 다시 복고를 원해 가운데만 틔우기도 한다. 넥타이 역시 마찬가지. 폭이 넓어지다가는 좁아지고 끝을 뭉툭하게 만들었다가는 양날검처럼 뾰족하게 만들기도 하는 터. 급변하는 세상에 한길을 고수하며 살아가자니 웬간해야지. 정해진 취향을 버리지 않고 감각을 유지하자니.
다들 제멋에 사는 세상이다. 어떻게 다니든 개성이 통용되는 때이다. 욕 먹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지만 때로는 나도 파격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불현듯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지.
Dmitri Shostakovich, Jazz Suite No.2 Waltz 2 * Richard Youngjae O`Ne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