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용돈이 필요해요

*garden 2009. 4. 25. 10:50




창경궁 초입에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처마선이 날렵한 팔작八作지붕 건물이 있다. 함인정涵仁亭인데, 영조가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안을 살펴보면 우물천정 사방을 돌아가며 툇간 보아지 사이 걸린 편액에서 도잠陶淵明의 사시四時 한 구절씩을 볼 수 있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峯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이라는. 여기서 春水滿四澤이란, 봄 물이 못에 그득하다는 말이다. 바야흐로 생명의 잉태가 시작되는 정경. 탁하면 어떠리. 동면에서 나온 개구리들이 물살을 짓다가 어느 땐 입을 모아 합창한다.
꽃 같은 어머니 입에서 잔소리가 와글와글 나오면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다.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묵묵부답이어야 편하다. 아등바등 사는 건 어머니 몫이고 기분 내키면 주머니에 든 돈을 왈칵 지출하는 게 아버지 역할이다. 여기 기초하자면 목에서 피를 짜내서라도 어머니는 아이들을 걷워 먹여야 하고 아버지는 그저 멀뚱히 떨어져서 헛기침만 하면 된다.
당신을 닮아서인지, 나도 돈에 대한 관념이 부족한 편으로 분류된다. 있으면 쓰는 것이라고 익히 알지만 손아귀에 잔돈 부스러기라도 있을 때 말이지.
어릴 적 학교에 가려면 준비물이 필요해 문방구에 들르거나 기성회비 등을 내야 하는 때도 있다. 집집마다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리 풍족하지 못한 살림에 다들 끙끙거려 덜컥 손 내밀기도 어렵다. 우물쭈물 눈치만 보다가는 빈 손으로 가는 적이 태반이다. 그러기에 앞서 용돈이라는 걸 받은 기억도 없으니. 겨우 명절 앞뒤로 새뱃돈을 받건만 이도 거의 어머니가 걷어간다. 또 그걸 당연시한다.


월급날에 기분을 낸다는 게 언제 적 일이던가. 쥐꼬리만큼의 돈이라 어림 밖에 두어야 하고, 그나마 집에서 타박이라도 안받으면 다행인데. 돈을 직접 만지지 않다 보니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다지만 그걸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집을 나서다 말고 아차 하는 때도 있다. 푼돈마저 없어서야. 현관에 다시 들어가 손을 벌리고서는 십여 분을 졸라야 한다. 사정을 헤아려 두말없이 '옛소~' 해야 하건만 이를 기대할 수 없다. 숫제 거렁뱅이도 이만큼 서 있으면 한푼 던져 줄텐데 말야. 에잇, 하며 관리를 자청하기엔 오히려 곤란하고. 우리 아이들도 여기에 대해선 불만이 여간 아니다. 둘째 녀석은 아예 드러내 놓고 대립각을 세운다. 돈이 없다고 툴툴대면, 은행에 가면 되지 않냐고. 은행돈이 다 우리 돈인 줄 아니? 제 엄마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면 이내 받아친다. 아빠가 벌어 올 땐 사랑스런 딸 몫도 틀림없이 있는데 왜 엄마 마음대로 쓰느냐고.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을 수만도 없다. 그 다음 날 조무래기들을 앉혀놓고 선언을 한다. 너희들 용돈은 이제 아빠가 주마. 매주 단위로 줄 터이니 대신 약속할 일도 있다. 약속이야 으레적인 거고, 기분 좋게 주고받을 수 있게 늘상 신권으로 바꿔둔다. 이도 자아를 지탱하고 도야하는 하나의 못澤이 될 테니.
큰 녀석과 차등을 두어 주는데, 사실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자라는 녀석들이 혹여 밖에서 기라도 죽을까봐 형편에 따라 가욋돈도 슬쩍 쥐어주고 계획하는 게 있다면 목돈도 얹어주며, 스스로에겐 술 한잔 덜하고 말지, 담배를 끊으면 되지 하며 위안을 한다. 제법 자라 처음보다 용돈 단위가 일고여덟 배는 커졌는데, 이젠 전같지 않아 섭섭함도 느낀다. 아침 부리나케 나가는 아이를 부른다.
용돈 받아가지 않냐?
내심 좋아라 하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어라랏. 시큰둥하게 한다는 말이 아직 용돈이 남아 있다나. 그 참에 뭐랄 수도 없고.
어, 잘 됐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 아빠 힘든 데 좀 빌려 주렴.
방학이라 빈 시간을 이용하여 아르바이트를 뛰더니 이 녀석에게 목돈이 생겼다. 벼르고 별러 작정한 것들을 사고 막고 해결하다 보니 흡족하다. 새삼 돈이 좋기는 하다. 감질나는 아빠 용돈이야 조족지혈이어서. 용돈을 준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참 동안이나 돈 쓸 일이 없다나, 해서 맥을 빼놓던 녀석이 두어 주 전부터 부쩍 핑게를 댄다. 이것도 해야 하구요, 저것도 해야 돼요. 말을 끊는다. 그건 엄마가 해주었잖아, 하다가는 그래, 기다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마파람 감추듯 하는 녀석이 새삼스러워 어깨를 툭툭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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