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이 굼뜨면 생각마저 모자라는 것처럼 비친다. 몽상에 빠져 있는데 문이 왈칵 열렸다.
야가 뭔 생각을 구래 하노? 몇 번을 불러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하달되는 심부름. 혼자만의 생각에서 미처 깨나지 못해 미적거리자 꾸지람이 성난 벌떼처럼 달려든다.
얼릉 일어나 가잖고 뭐하노? 어깨도 좀 펴고. 사내가 토끼를 잡으러 가도 호랭일 잡으로 갈 때처럼 눈빛이 왕왕해야 하니라.
채근 아니라도 우리는 민첩하게 움직이게끔 조련되었다. 욕심 많은 엄마는 가끔 발톱을 세우고 으르릉거렸다. 아이들이 주저앉고 잦아드는 걸 싫어했다.
부리나케 교통카드를 체크하고 뛰어내려가 마악 떠나려는 전동차에 올라타기. 북적이는 칸을 이동하여 다음 환승지 통로에 가장 가깝게 서 기다리기. 어정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누구보다 빨리 지상으로 쫓아나오기. 한눈 팔지 않고 한달음에 목적지에 닿기. 경쟁에서 살아남기 등. 늘상 새기고 있어야 할 일은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도 날이 밝아 깨어나면 안광을 돋웠다.
엄마 말이 백 번 지당하다. 삶이 별건가. 토끼처럼 움직이기는 싫지만 거북이처럼 기기는 더욱 싫다. 제 아무리 꾸준한 거북인들 어떻게 나를 따라 잡을손가. 혹여 내가 토끼일지라도 절대 우화 속처럼 나무 그늘에 들거나 발을 뻗고 누워 오수에 잠겨드는 일은 없다.
힘을 내 걸어. 큰 비가 내릴지도 몰라.
그렇다. 해가 지기도 전인데 먹장구름이 몰려들어 사방이 컴컴해진다. 그래도 쉬어가자는 아이들.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 쉬지 않고 걸어야만 저 산을 넘을 수 있을거다.
앉으면 드러누울거다. 그 다음에는 일어날 수 있어야지. 다섯 번 쉬어야 할 걸 두 번으로 줄여야 더 많이 걸을 수 있어. 백만 번을 팔굽혀펴기한 다음에도 힘이 남는 차세대 건전지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떼서 아이들 시야에서 멀어진다. 야속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에서는 오직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더 힘을 내렴, 악착같이. 저기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까지만 가자.
떨어진 아이들. 가볍게 코를 고는게 애처로워 이불을 여민다. 그러다보니 아래 삐죽 나오는 발. 여린 살갗에 물집이 잡혀 있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잠결에도 움찔거린다.
그 날 이후로 아이들은 앓아누웠다. 애들 엄마가 야속한 눈길을 주지만 애써 무시한다.
거참 나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야.
혀를 차며 벌떡 일어섰다.
일단의 무리들과 뒤섞여 걷는 산길. 재담과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분주하게 발이 뒤엉켜 제대로 걸을 수 있어야지. 이럴 수야 없어. 손짓으로 우리 일행을 골라냈다.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나. 사람들이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서 있었다. 길을 벗어나 숲을 헤치고 올라 암릉을 바로 치기 시작했다. 물기를 지운 손을 암반과 암반 사이 틈에 넣고서는 용을 써서 조금씩 몸을 끌어올렸다.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에 묻었다. 별안간 앞이 트이며 천애 절벽이 드러났다. 성큼 무릎을 올리다가는 눈을 감았다. 아찔하다. 소름이 돋는다. 이곳에 왜 내가 서 있어야 하는가. 불현듯 회의감이 든다. 걸핏하면 앞을 가로막는 벽들. 벽을 넘어서면 뚝 떨어지는 무저갱들. 더듬거리며 길을 헤쳐 나아간다는게 암담하기만 했다.
아이들과 해안가를 걸었다. 뙤약볕 아래 맨발바닥이 따끔거린다. 검은콩 흰콩 새콩 완두콩 들, 아이들이 노래를 한다. 콩돌이 몸을 비비며 자그락댄다. 결국은 이렇게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을. 산정에서 맞던 외로운 바람을 떠올렸다. 바람에 패인 바위가 날카로운 선을 세우고, 공동으로 잉잉거리는 울음 소리를 낸다. 여기는 낮은 곳, 더욱 낮게 몸을 낮추어 함께 있는 돌맹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걸음을 빨리 뗄 수 없어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쫓다가 웃었다. 길은 직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때로 돌아가기도 하고 발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는 것을. 가로막히는 것마다에 주문을 외우며 문을 열었다. 때가 되면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억지부채질하며 우격다짐한 날로 채워진 세월이 가엾다.
Klaus Jurgen Spannho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