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앞이 종점인데. 그전에 썰물처럼 빠져 드문드문한 승객. 터덜거리던 버스가 마지막 트림을 게워내자 비로소 조용해졌다. 근사한 선글라스를 착용한 운전기사가 일어나다 말고 쓰윽 뒤돌아본다. 채근이 없어도 서둘러 내리는 사람들. 햇볕이 사방에 난분분하다. 미간을 좁히며 한참을 낯설게 서 있었다. 먼지로 분치장한 것 같은 간판이 허공에서 삐걱댄다. 다들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얼추 사람 사는 동네가 끝나는 것 같다. 구릉을 두어 개 지나 커다란 못이 있던 이곳은 기억에 남아 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소정이네에 가보라는 선생님 말씀 때문에 별수없이 가는 길은 왜 그리 먼지. 길 한가운데에서 춤추는 회오리 바람을 피해 숨을 멈추기도 하고, 둔덕에 책가방을 던져 둔 채 부들 사이 헤집는 잠자리도 쫓다가 닿은 동네. 집집마다 감나무 두어 그루씩은 품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돌담 너머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허술한 싸립문 안에서 멍석 위 콩 껍질을 뒤지다 말고 눈을 헤뜨던 계집아이가 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데, 내 대성일갈에 깜짝 놀란다.
"야~이 기지바야. 멀쩡하문서 학교 안나오믄 우짜노? 얼매나 걱정하는데."
봄날 연초록 나뭇가지에 물 오르듯 그동넷길에 다시 들었다. 신작로가 남의 나라처럼 여겨지던 건너편 둑방에도 서슴없이 통하고, 하늘땅 거침없이 휘돌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깎이고 파헤쳐져 있어도 낯익은 지명을 따라 가다가 화들짝 놀란다. 예전 소정이가 이쯤에서 살았지, 아마.
다음날 소정이가 학교에 왔다. 무안할까봐서 눈길을 피한다. 억지로 집까지 달려간 게 효과가 있어 흡족하다. 곁눈질로 봤더니 오래 된 저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 생경하다.
어떻게 소정이가 있던 동내 사는 아이를 알았는지. 동아리 등에서 마주치며 알게 모르게 친근감을 키우던 중이었는데. 그게 어느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여 난감하다. 연원이라도 캐고 오해를 접으려고 찾아왔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나중에 물어볼까, 아직 소정이가 여기 사는지 서로 아는 사이인지 하다가는 마음끓임을 사그라뜨렸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타야지.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도 끊어지지 않는 기억. 뒤죽박죽인 곳에서도 용케 자리를 지키다가 불현듯 쫓아나온다.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먹어치우듯 벋어나기만 해서 어지럽던 도시. 그 한켠에서도 누군가에게 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는데, 인제 아득하게만 받아들이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