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다음 봄날에

*garden 2011. 5. 25. 11:15




집 안 어디엔가 그물을 쳐놓은 할머니. 거기 내가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이다. 나가기 전 치맛단을 쥐고는 나붓이 앉아 손주 옷차림을 여기저기 간섭한다. 오물거리는 입으로 어찌 그런 천둥소리를 내는지, 잔소리가 한 소쿠리는 된다. 말 끝에 다짐을 놓는다.
야야, 할매 말을 절때 흘려들으믄 안된데이.
애매한 표정으로 잔소리야 한 귀로 흘리며 고무신 코로 흙바닥을 툭툭 찬다. 할머니는 늘 집에 가만히 머물라는데 그럴 수 없다. 심심한 채로 일초도 있을 수 없단 걸 왜 모르나. 외갓집에 오기 전에는 신나는 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을 것만 같아 가슴 두근거릴 정도였는데, 한 이틀 휘젓고 다니자 싱겁다.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마을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우예 가만히 있노. 그기 사람이가?
광주리를 이고 고샅길을 내려가는 할머니한테 안들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소리친다. 재미없는 마을에도 또래는 많다. 헌데 왜 전혀 그런 내색이 없을까.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시계바늘처럼 자기 할 일을 찾아 각자 돌아가곤 했다. 내가 번쩍번쩍한 자동차가 요란스레 다니는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뿌리치고 가는 게 못마땅하다. 나뭇짐을 동여매거나 소가 먹는 풀을 잘구별하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그게 중요치 않다.


부지런한 형택이 오촌아재는 밤 시간도 그냥 지나기 아깝다. 초당에서 가마니를 짜든지 새끼를 꼬는데, 입담이 구수해 아이들이 사뭇 몰려들곤 했다. 이야기를 쉬이 시작하지 않았다. 빠진 얼굴이 있으면 개중 누군가를 시켜 불러오게 하면서 뜸을 들인다. 데리러 간 녀석마저 기척 없으면 기대를 부풀리던 조무래기들이 조바심 낸다. 그걸 보며 아재는 빙글거렸다. 일거수 일투족에 따라다니는 시선을 모를 리 없다. 양 발로 자신 있게 지푸라기를 잡고는 손바닥에 침을 뱉어 꼴 참이면 다들 숨을 멈췄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 간을 빼먹는다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 얼마나 놀랐던지. 우리는 겁에 질린 눈길을 교환하며 바깥쪽을 외면한다. 가끔 이모도 마실 갔다 오는 밤길에 안산 구석진 곳에서 휘 번득이는 도깨비 불을 봤다고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귀기어린 불이 쫓아오는 바람에 간신히 도망쳤다고 했다. 나와 동생들은, 밤에 마당을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측간에 다니러 갈 엄두를 못냈다. 대나무 숲에서는 온갖 소리가 다 났다. 형택이 아재나 이모가 입을 삐죽거리는 줄도 모르고 고샅을 움켜쥔 채 동동거리다가 대청마루 끝에서 무량한 어둠을 향해 힘을 주었다. 그나마도 일을 말끔하게 치루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쫓아들어 봉창을 우당탕 내닫는 바람에 실소하게 만들었다.


한낮 햇살은 따갑다. 부쩍 키를 높인 나무가 기웃거렸다. 입에 문 삘기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산 너머에서부터 몸집을 키우며 하늘을 덮는 뭉게구름. 바람이 싱그러운 숲의 냄새를 퍼 날랐다. 탁란을 꿈꾸는 뻐꾸기 울음이 아련하다. 살가워진 나무들이 우수수 손을 흔든다. 몽글몽글 움을 틔운 새닢 사이 터뜨려지는 꽃망울들의 환희가 들린다. 하루이틀 새 깨어난 벌레들이 풀섶을 기어다녔다. 기다리면 된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고, 조그만 아이에게 이르는 할머니 말씀이 쟁쟁거렸다. 내가 염려하는 성가심이나 답답함, 두려움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쉴새없이 뛰어다닌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잠 재워 뿌리친 그 시간들이 인제 어느 때보다 그리워졌다고. 다시금 시작한다면 고분고분 세상이 흘리는 말에 수긍하며 걸을 수 있을텐데.











Keiko Matsui, Across The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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