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한 여인처럼 돌아앉은 숲. 그 초록세상에서 활개 치는 이는 누구인가. 새들은 숨바꼭질을 일삼고 바람은 나뭇잎을 쑤썩였다. 녹색 굴레가 전생의 빛인 것만 같아 무의식중에 찾은 숲. 물과 기름처럼 세상에 섞이지 못해 겉돌던 정신이 비로소 위안을 받는다.
즐거워 터뜨리는 웃음이 드높을 때 나는 슬픔에 잠기고, 사람들이 양지로 나선다면 기꺼이 음지에 머물러야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엇나가기만 하는 걸음. 곧이곧대로의 억하심정이라도 다스려야 하는데 말야. 지난 봄날의 풀꽃 사그라진 자리를 눈여겨보며, 바람이 몸을 뒤채던 둔덕 아래를 서성이며 가만히 울음을 삼켰다. 포자도 없이 이 울음은 왜 곳곳에 개체를 만들어 놓는지, 원. 키큰 나무들의 침묵이야말로 대견스럽다. 아름드리 나무를 짚고 일어서다가 핀참나무 잎새에 새겨진 암호를 기어이 찾아냈다. 올라온 신물을 삼켰다. 무의식중에 어금니로 짓씹던 되새김질의 추억 때문인가. 마음이라도 열어야지. 혹시 다시 없는 오묘한 생의 비밀일지도 몰라. 정몽주, 길재,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사사를 받았다. 하지만 강직하고 올곧은 게 오히려 흠인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위협을 느끼던 훈구파의 모함으로 결국 탄핵되고 만다. 바로 훈구파인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비인 것을 기화로 뒤뜰 나뭇잎에 조청으로 글자를 써 이를 벌레가 갉아먹게 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귀였는데, 사료가 꾸며 넣은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이는 그만큼 숨가쁘게 돌아간 당시 치열했던 상황을 일러준다. 정암이 학문과 경륜이 완숙기에 접어들기 전 급진적으로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한 것은 나중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노란 햇살을 자양분처럼 받아들이며 자라는 나무들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도 빛이 훑어간다. 귀 기울이면 들리는 단발마의 비명도 사실은 애절한 노래인지도 몰라. 빠른 전개와 비트 중에도 언뜻언뜻 새길 수 있는 대목. 조롱으로 상대를 비웃기도 하며 억압하여 세상을 무겁게 다스리는 법과 서로간의 질시와 조소, 비난과 대립, 이에 따른 분노로 가득 차있기도 했는데. 가끔은 들끓는 용광로 속에서도 녹색바람처럼 피어오르는 새 날에 대한 기대가 있어 다행이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새들이 날아올랐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몸을 곧추세우려다가는 휘청한다. 나는 잎새 뒷면에서 허기를 채우려고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절실하지도 않아 만사가 귀찮기만 했다
Jean-Philippe Audin, Toute Une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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