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밤은

*garden 2012. 7. 12. 14:34





등잔불에 비친 그림자는 움직임에 따라 흙벽에 길게 드러눕기도 하고, 거미처럼 거꾸로 매달려 천장 서까래를 거뜬히 넘나들기도 했다. 그게 재미있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다니며 몸을 뒤틀다가는 결국 혼난다.
'야들아, 정신 없따. 지발 좀 가만히 있거래이.'
힐머니는 무명이불 홑청을 손질하다 말고 하품을 했고, 이모는 헌옷을 깁는 참인지 바느질 땀을 뜨느라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때 동생이 쭈볏쭈볏 일어났다. 초저녁부터 아랫배가 아프다더니. 급하게 변소에 가야 한다는데. 눈치를 봐도 이모가 따라갈 기미는 없다.
'그런 거야 당연히 형이 따라가야제.'
안채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제법 떨어진 변소에 동생을 데려가서 앉혔다. 냄새와 어둠은 어느 게 더 견디기 어려운가. 들고 온 호롱불을 걸어두고 바깥에서 기다린다. 동생은 잠시도 뜸들이지 않고 애절하게 형을 불러 확인한다. 자칫 혼자 남아 있게 될까 봐 염려스럽다. 식구들과 어울려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나앉아 동떨어지면 밤이 싫다. 밤의 실체인 무섭고 답답한 어둠 안에는 일면 슬픔이 잔뜩 배어있는 듯 싶기도 하다. 아궁이 옆 부지깽이도 쫓아나가야 하는 바쁜 때면, 생전 밭에 나가는 법이 없는 할아버지도 하얀 모시적삼에 꾸부정하게 구부린 큰키로 똥장군을 지기도 했다. 호롱불이 흔들려 벽에 걸어둔 똥장군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지금 동생은 용을 쓰면서도 거기 잔뜩 겁을 먹고 있다. 조금 전까지 유희로 여겨지던 그림자가 무섭기만 하다. 재미있는 엣날 이야기라도 하라며 소리치는데, 막상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야지. 변소 옆 담장을 따라 늘어선 대숲을 뒤흔드는 밤바람이 심상찮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친다는데 어디, 귀를 쫑긋 세웠다. 어둠 속에 손을 들이밀자 손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한 발이라도 더 내딛어 어둠 속으로 들어갈까봐 안달하는 동생. 대낮에도 습기가 차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깊이 가라앉아 있는 대숲 안이니 오죽할까. 발이 징그럽게 많은 지네가 슬슬 기어다니거나 두꺼비가 꿈지럭대고, 가끔은 퉁퉁한 구렁이도 똬리를 틀고 있어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공간. 마음 여린 동생이 겁을 감추지 못하는 바람에 나는 더러 겁이 나도 티를 낼 수조차 없다.
구름 속에 든 그믐달이 창백한 민낯을 드러냈다. 대숲 머리에 얹혀 간간히 부서지는 달빛이 황홀하다.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 아이들이 걱정스러운지, 대청 아래까지 성큼 내려와 우리를 부르는 이모 목소리가 아득하다.


















Origen, Dance of The Clou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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