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우리 겨울

*garden 2015. 3. 13. 10:46




큰외삼촌이 집에 왔다. 심부름으로 술 한 주전자를 사 온다. 교자상에 술과 간단한 다과를 차려냈는데, 드시는 동안 지나는 인사치레 두어 마디가 고작이다. 작은외삼촌과 마찬가지로 교직에 있었는데, 식구들이 모여 와글거릴 때에도 한켠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분이다. 지나다 들렀을까. 그렇더라도 그렇지. 갸우뚱하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이란 진중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래서인지.
"입 다물고 우예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어."
외삼촌이 가신 다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어머니. 집안 내력인지 외삼촌 두 분 다 아들 하나에 여식들만 줄줄이 낳았다. 큰외삼촌댁 윗누이는 막내이모보다 나이가 많다.
가도가도 희끄무레한 눈밭이다. 천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방천길을 따라 걷는데, 바람이 없어 그나마 나았다. 실타래처럼 흘러내린 강줄기가 겨우내 꽝꽝 얼어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받았다. 찬공기에 얼얼한 귓볼을 만진다. 얼마나 걸었을까. 밤새 걸을 수도 없는 일. 감감하여 집에 돌아가기도 마땅찮다. 여기서 얼마쯤 더 가면 큰외삼촌댁이지 않을까. 명확하게 기억할 수 없어도 근방에 가면 어머니를 따라가 들르던 집을 찾을 수 있을거야. 막연하던 걸음이 빨라졌다.

"아이고, 이 시간에 니가 왠일이고?"
"......"
"이 엄동설한에 옷이 이게 뭐꼬? 양말도 다 젖었꼬."
외숙모가 호들갑을 떤다. 따뜻한 물로 씻게 하고 밥을 차렸다. 궁금하여 이것저것 묻는데 밥알을 입에 물고 꿍꿍댄다. 안방에 딸린 건넌방에서 쫓아나온 이종사촌들이 육십촉 전구 아래 나를 두고 옹기종기 앉았다. 여동생들이 집적댄다.
"야야, 어데서 장난질이고? 오빠 밥이나 먹게 쫌 내비둬라."
겨우 상을 물리고, 아이들과 뒤섞였다. 웃음 소리가 터졌다가 와글댄다. 이야기도 나누는 둥 마는 둥 까무룩 잦아드는데, 외숙모가 큰언니를 부르라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그 밤에 햇빛 환한 눈밭 위를 훨훨 나는 꿈을 꾸었다. 재잘거리는 동생들 소리가 끊이지 않고 따라왔다.

이미 결혼해 아이도 둘이나 있는 누이가 이른 아침에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리겠고, 쟈를 혼자 보낼 수도 없으니 니가 가서 큰고모 한번 뵙고 오이라."
아침을 거뜬히 해치웠다. 배웅을 받으며 누이와 함께 일어섰다. 죄지은 것처럼 끌려간다. 다행히 날이 맑다. 어젯밤 퍼부은 눈이 순식간에 녹아 질척거리는 길, 말끔한 신발에 흙탕물이 들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해 따라가는 사이에 저절로 흥이 난다. 겨울이 끝나는 기미가 보인다. 저만큼 앞서가던 누나가 돌아보며 손짓한다. 웃으며 드러낸 하얀 이가 눈부시다.
"원아, 빨리 쫌 와라. 누나하고 손 잡고 가자."





 








Chris Botti, A Thousand Kisses D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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