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겨울굽이

*garden 2016. 3. 2. 16:11




눈이 귀한 겨울. 메마른 날이 이어져 자고나면 콧속이 맹맹했다. 기온이 곤두박질쳤다가는 주춤하여 오르지 않았다. 기침 환자들이 수두룩하여 식사중에도 예사로 콜록거리고, 엘리베이터 안이나 회의중에도 밭은소리를 낸다. 몸살로 드러누웠다며 카톡에 오른 한줄 소식을 보기도 한다. 무시로 상가(喪家)에 다녀오기도 했다. 한겨울 나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다들 시름거리는 중에 탈 없는 내가 이상할 지경이다. 와중에도 겨울을 잘 넘기는 건 난(蘭)뿐이다. 햇빛 환한 오전에 가느다랗게 벋은 푸른 잎을 닦는 동안 생기가 되살아나곤 했다.
동생은 베란다 가득한 난을 건사하느라 바빴다. 차(茶)를 내오던 동생댁이 입을 삐죽거린다. 빈 난화분이 보이면 자기가 무조건 갖다 버린다며 슬쩍 고자질한다. 사촌은 안방 창틀 가득 난을 올려 두었는데, 십여년 전에 이미 한두 촉밖에 남지 않았던 것도 그대로인 채 분무기로 물을 뿜어댔다. 물기가 공중에 난사될 때마다 창가 가득한 햇빛에 무지개가 언뜻언뜻 일었다. 잎보다 더 무성한 난 뿌리가 화분 위로 돋아 귀신 발처럼 치렁치렁해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래, 차라리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은지 몰라. 헌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말 못하는 식물이 애닯다. 생장이 제대로이지 못하면 파뒤집어 엎었다가 합했다가 섞어두기를 예사로 하여 오히려 돌봄 받는 게 몸살이지 않을까.
마을버스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아파트 한 라인에 사는 어른이다. 꼿꼿한 자세에서부터 빈틈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러한 점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게다. 스스로 창살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는 일이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중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 뒤편 아줌마 핸드백이 자기 옆구리를 짓누른다. 그게 못마땅하여 이리저리 몸을 틀지만 상대가 알아차려야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게 집에서였다면 금방이라도 폭발했을 게다. 못본 척할 수 없어 일어났다.
"이리 앉으시지요!"
"아니, 아니. 그러지 마시고....."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얼굴 가득 서리던 노기가 어느새 눈 녹듯 없다.
"그런데 안면이.....?"
"예, 같은 아파트에 삽니다."
"그래서였군요."
사람은 보려는 것만 본다. 오가며 마주치기도 했는데 기억이 애매한가 보다.
아파트 화단에서 담배를 피며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이 못마땅하다. 걸음을 멈추고 허리춤에 손을 잡고서는 노려보는 눈매가 매섭다. 한마디 던질 테세인데. 그런들 받아들여질까. 지나다가 만류차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이구, 어딜 그렇게 가세요?"
"운동 하러 가는 중입니다. 날이 제법 차갑지요?"
"그러게요. 겨울이 가는 중인데 아직도 쌀쌀합니다."
마주치는 것이 살아온 틀에 맞지 않으면 못마땅하다. 내버려두면 엉망진창이어서 싫다. 종일 웃을 일도 드물다. 다행히도 내게 호감을 가져서인지 속에 담은 말을 내비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여동생과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조카와 나왔는데 반가움도 잠시,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물을 조심해서 따뤄라. 젓가락질을 바로 해라. 이건 왜 먹지 않냐? 외삼촌이 말씀하시면 분명하게 대답해야지.....
넌지시 내가 거들었다.
"얘, 잔소리가 심하다."
"아이, 오빠가 몰라서 그래. 생각을 하며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직 애들이잖아. 살아가면서 익히기도 해."
"그래도 그렇지. 많이 배우고 똑똑하면 뭘해. 생각만 하고 안다면서 정작 행동은 단편적이니 보는 동안 열불이 치밀어서."
"너도 이제 늙나 보다. 사천 년 전의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씌어져 있다더라. '요즘 애들이란 것들이.' 하는 한탄이."
한겨울 내내 신새벽에 출근하고 한밤중에 들어오는 생활을 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때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눈을 뜨면 허덕거려야 했다. 때아닌 겨울 바람이 매섭다. 옷깃을 여미고 걷다보면 가로늦게 고행길에 오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혼자 세상 밖에 내쳐진 듯 사람이 그립기도 하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동네 어른을 만났다. 탈이 났는지 그새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절뚝거린다. 인사를 하려는데 황망스레 시선을 돌려 딴전을 핀다. 영문도 모르고 머쓱해졌다. 무엇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소심한 기색을 보이는 모습이 왠지 측은하다. 끝날 듯하던 겨울이 잔뜩 웅크린 채 비키지 않았다.












Laquiruna, Acuarela En El Vi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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