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지 않은 겨울이 그나마 끝났다. 밝은 햇살 아래, 너도나도 깨어나 재잘댄다. 소란이 잦아들다가도 이어지며 그치지 않았다. 느닷없이 주름날개를 양 옆에 단 낯선 녀석이 나타났다.
"넌 누구니?"
"어디서 왔어?"
기웃거리며 관심을 보여도 아랑곳 없이 내려앉은 곳이 제 터전인양 바닥을 딛고 키를 북돋운다. 누가 시비를 걸거나 비아냥대도 끄덕없다.
어느 아침, 지게를 지고 나서는 이생이에게 할머니가 일렀다.
"야야, 오늘은 좀 일찍 들어와서 저게 오동낭구 좀 잘라라."
"앙이, 저게 언제 저리 커뿔쇼잉?"
"저넘 땜시 텃밭에 그늘이 져 채소가 제대로이것나!"
"초당 앞에도 어느새 뿌리내린 오동낭구가 둬 그루 있더만요."
"갸들도 생명인데, 거긴 놔두고."
언질 한마디 없이 싹을 튀워서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 녀석들. 할머니 말 맞다나 오동나무는 그해 커다란 잎사귀를 떨굴 무렵 내 키 두 배쯤은 자라 있었다. 제 나름으로 열매도 맺고 지우기를 그치지 않는 동안 서너 해가 지났다. 쑥쑥 자란 오동나무가 외갓집 기와지붕 위로 불쑥 솟아 동네 너머 안산 등성이에서도 보일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는 날뛰는 노래를 싫어한다. 하지만 '황정자'의 '오동동타령'에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하는 첫 구절을 들을 때면 까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시집 올 때 장만한 오동나무 반닫이장을 옻색이 반들반들해지도록 닦았다. 햇볕 뜨거운 날이면 반닫이장은 대청 구석에서도 달아올라 붉힌 낯으로 눈길을 끌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이른 아침. 허름한 도시 뒷골목을 지나다가 눈길 끄는 연보랏빛 떨어진 꽃대를 보았다.
'호오, 이건 오동나무꽃이잖아!'
고개 들어 위를 본다. 십여 년 전 이맘때 무주 구천동을 탐방하고 내려오다가 사십구번 국도상에 우뚝한 오동나무에 만발한 꽃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장소는 다르지만 이곳 허름한 공터 한켠에서 오동나무는 날마다 꽃을 피우고 푸르른 잎을 뿜어 지난한 겨울 초라한 자기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현삼과의 오동나무는 적당한 자리 아무 곳에서라도 싹을 틔운다. 한여름 풀처럼 쑤욱 자라는 오동나무는, 초본과 목본을 합하면 수십 종이지만 나무는 한 가지뿐이다. 이십년 정도에 키 십미터를 간단히 넘기고, 나무 둘레도 한아름 이상 커진다. 지름이 이십~삼십센티미터 정도인 오각형 잎은 생장이 왕성한 어릴 적에는 거의 일미터에 육박하기도 한다. 덕분에 활발한 광합성으로 양분을 단기간에 공급하여 몸체를 급속히 불린다. 대체로 빨리 자라다 보니 목질이 단단하지 못하다. 속을 잘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양분 공급과 저장을 담당하는 어린 세포들이다. 물관도 많으며, 단단하기에 관여하는 목섬유는 사십 퍼센트 남짓이다. 겨우 박달나무 삼분의일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수치상으로는 푸석푸석하여 쓸모가 없을 것 같다. 허나 오동나무는 다르다. 효과적 세포배열을 한 다음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섞어 스스로의 가치를 높였다.
이에 오동나무는 생각보다 단단하여 재질이 좋다. 연하고 가벼운 나무는 가공하기 쉬우며, 무늬도 아름답고 쉽게 뒤틀어지지 않는다. 습기에 강한 성질에다가 불에도 잘 견뎌 흔히 전통 옷장이나 관 재료로 쓰였다. 더구나 소리 전달 성능이 다른 나무보다 월등히 좋아 옛 악기 재료에도 쓰였다. 우리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 전통악기에도 오동나무가 등장한다. 이를 두고 뛰어난 사대문장가인 신흠은 '야언(野言)'에서 '오동은 천년이 지나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꽃도 아름다운 오동나무. 봄 끝자락인 오월 말경 가지 끝에 원뿔 모양 꽃대를 내밀고 손가락 길이 만한 종 모양 연보라색 통꽃을 피워낸다. 꽃잎은 다섯 개로 갈라지며 향기가 진하다. 열매는 익으면서 아래로 늘어지고, 시월 경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으로 껍질이 변하면서 회갈색이 된다. 초겨울에 들어서면 둘로 갈라져 안에 들어 있던 날개 열매가 겨울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오동나무에는 오동나무와 참오동나무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추위에 강한 참오동나무가 흔하며, 이는 울릉도가 원산이다. 오동나무는 통꽃 안쪽에 보랏빛 점선이 없고, 참오동나무에는 점선이 뚜렷하다. 일본에는 오동나무가 없으나 울릉도 참오동나무가 건너가면서 널리 심었다. 이는 나막신을 비롯한 생활용품에 두루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