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감자처럼 딩굴고 싶어

*garden 2004. 5. 17. 18:06







purple & orange by Kessler Daniel Patrick




막내외삼촌이 결혼한다.
새벽 이른 때부터 온동네 아낙이 다 모인다. 참새 떼처럼 재잘대고 시끌거린다.
"이 집 허우대 좋은 신랑은 어디 있대?"
"아, 자네가 그걸 왜 물어? 지금 남의 신랑될 사람 찾아서 뭐해!"
깔깔거리며 앞말을 자른다. 들어서던 아낙이 영문을 모르지만, 웃음에 동참한다.


누군가 일찍 집 주변을 돌았다. 두터워지다 보니 수피 겉면이 갈라진 감낭개에서 밤새 떨어진 홍시. 주워 장독에 올려 두었다. 속살 터진 곳에 징그럽도록 까만 개미가 들끓는다. 빨강과 검정색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 섬뜩하기만 하다. 달착지근한 맛이 뭉쳐 목으로 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삼켰을 개미 때문에 조바심이 난다.


어른 키보다 높게 돋운 집 대청에 서면 마을이 한눈에 쑤욱 들어온다. 크게 삼등분하면 위에 우람한 산이 들어앉는다. 그 아래 미처 떠나지 못하고 웅크린 안개가 몸통을 낮춘다. 한 뼘씩 늘어진 논들과 옹기종기 모여 기댄 초가들. 옆으로 잡아당겨진 들을 구분지은 논둑길에 아낙들과 머리에 인 양동이나 들것이 들쑥날쑥하며 끄덕인다. 우물에 가는 길이다.


마을의 크고작은 소식이나 안방 얘기까지 슬그머니 거론된다. 씻어야 하지만 북새통에서 쉽지 않다.
"어디 이리 와 바라! 운제 왔노?"
으레 너도 나도 한 번씩 볼을 꼬집는 성화를 부린다. 두레박에 길어올린 물은 깊은 속에서 올라 싱싱하다. 간신히 세수만 하고 떨치듯 벗어난다.


아버지를 따라 진작 와 있던 남동생이 마당에서 아장거린다. 제 형을 보고 반갑다고 두 손을 내밀며 뒤뚱거린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예정에 잡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더러 일어나는 일들을 당연시하여 받아들이는 어른들은 너무 태연하다. 나쁜 일은 좋아지겠거니, 좋은 일도 어떤 땐 나빠질 수 있겠거니 하며, 그걸 액땜이라 치부한다. 은연중에 가슴 속 조그만 믿음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주겠거니 하면서.
여름내 장마에 흙이 쏠려 비죽비죽 내민 돌 위에 동생이 기우뚱한다. 아래위 가지른한 이로 혀를 문 채. 소리도 없이 자지러진 동생의 입가로 새빨간 피가 몽글몽글 흘러나온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사랑채는 내 작은 가슴을 졸이면서 단련하는 곳이다. 종일 햇빛도 들지 않는다. 마음 놓고 도사린 어둠과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 두려움 들이 묘하게 엉켜 있다. 여인네들은 얼씬도 않는다. 안에서 외할아버지의 잔기침이 간간히 들린다.
"왜정때 순사들에게 치른 곤욕이 오죽 했어야지. 쯧쯧!"
사람들의 우려보다 당신의 의지가 강했나 보다. 이후 용하게 일어났지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신음을 내뱉는다. 때로 신음이 지팡이 놀림과 묘하게 박자를 맞추기도 한다.


사랑채 안마당 숫돌에서 머슴들은 아침마다 낫을 간다. 정갈한 심정으로 예를 펼치듯, 도를 깨치듯 엄숙하게 앉는다. 그들의 어깨 위로 氣가 뭉클뭉클 솟는다. 시퍼런 날이 세워지면 의기양양하게 지게를 지고 나간다. 한귀퉁이에 메꽃이나 분꽃이 소담하게 모여 그나마 삭막함을 누그러뜨린다.


사랑방 옆 초당 바닥에 계절이 다 가도록 감자를 깔아놓고 말린다. 겨울밤 나와 이종들이 몰려간다. 그리고는 가마니 짜는 머슴들이 풀어놓는 이야기의 도깨비나 호랑이, 선녀와 나무꾼이 횡행하는 세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대숲에는 뱀이나 두꺼비가 들끓는다. 호기심이 일어도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앞에 놓인 두엄이 일년 내내 썩어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두엄이 들썩거린다. 그 위 모이를 찾던 장닭이라도 불쑥 나타날 참이면 간이 콩알만해진다.


동생을 업고 냅다뛴 아버지의 하얀 셔츠가 새빨간 피로 물들어간다. 나는 초당방 한쪽 감자를 치우고 동그마니 허물어져 내린다. 아무도 날 찾을 수 없다.
나는 거인처럼 커졌다가 아침에 삼켰을지 모르는 개미처럼 순식간에 작아지기도 한다.





Capture The Moment * David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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