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병, 1983 여름
몇날 며칠 퍼부은 비로 무른 산이 주저앉는다. 빗물이 앉은뱅이 산을 훑어 패인 흙을 싣고 와당탕 흘렀다. 사방이 물길이다. 건너뛰다가 섬에 갇혀 둘러보면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잦아드는 비. 물기를 안아 묵직한 구름이 산을 거슬러 오른다. 어스름이 내리는 사이 용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형,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글쎄, 저게 악현산이라면...뒤쪽까지 돌아가야겠지.'
우뚝한 산의 형체가 마음을 짓누르듯 멀다. 어둠이 산의 윤곽을 덮었다. 한 열흘 내린 비로 길이 동강났다고 했다. 맑은 날에도 물을 헤쳐 건너거나 벼랑 아래 외길에서 차와 마주치면 아찔하던, 흙먼지 풀썩이던 길이라 당연했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지도를 펴고 선을 그어 상류쪽으로 돌기로 했다. 다닌 적은 없지만 길이 남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시를 읊듯 나직하게 내뱉는다.
'목숨을 걸고 캄캄한 밤에 사방 물길을 건너는 우리?'
'내일 출근이니 방법이 없잖아.....출품도 말일까지는 해야 하고.'
그림을 놓은 지 오래 되었지만 다급해 매달리는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며 부닥치는 풍경은 낯선 모양이었다. 해는 늬엇늬엇하고, 곧 무너질 듯한 정류장을 빠져나오자 익숙함은 어디에서고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눈앞 현실이 막막한 곳에 다다라 있었다. 화폭으로 삼을 천과 깡통에 담은 수성페인트를 색깔별로 마련해 묶은 짐이 의외로 부피가 컸다. 들고 움직이는 동안 손가락이 끊어지듯 아팠다. 바지를 잠방이처럼 걷고 건너야 할 때도 있다. 산중이어서 그런지 유월 밤이 으실으실했다. 맨살에 소름도 돋는다. 한동안 산 뒤편으로 뿌연 기미가 남아 있었는데, 순식간에 어둠이 짙어져 먹물을 뿌린 듯 만상을 삼켰다. 조급증이 인다. 서두를수록 구부러진 길은 앞뒤를 가늠할 수 없다. 여기가 어디 쯤일까. 우리가 있는 곳을 몰라 답답했다.
'형, 저게 뭐야?'
어둠 속에 맑은 빛이 선을 만들어 이어지다가 끊어지기도 한다. 중병 든 환자의 생명선이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나는 듯했다. 허겁지겁 길을 재촉하여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언제부터일까, 깜박이는 빛이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연록색 생명선은 춤추듯 현란하게 맴돌다가 길을 가리키듯 정지하기도 했다.
'반딧불이잖아!'
'어머, 이게 반딧불이야?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봐.'
우리가 걷는 길은 과연 목적지로 향하는걸까. 인가라도 나타나면 사정하고 무조건 하룻밤 묵을 판국이다. 캄캄한 산중에, 그나마 길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지친 기색을 낼 수 없다. 동행이 맥이 빠질까 봐, 입 다문 채 묵묵히 걸었다.
비로소 주위를 둘러본다. 인적 없는 밤이 거친 숨소리만으로 헐떡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른 세상에 들어섰다. 그래, 밤새 걸어가면 어때. 어딘들 나오지 않을까. 짐을 내려 놓고, 신기한 듯 허공을 휘저었다. 저승으로 드는 통로이듯 길이 무너져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도 들리는 소리의 소용돌이. 시커먼 물이 콸콸 끓어오르는 중이다. 그 속에서 반디 무리가 세상으로 나왔다. 칡흙같은 세상에서 아픔을 노래하듯 반딧불이 별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아침마다 해는 간신히 등성이에 올랐다. 몇몇 키큰나무들이 얼핏 수줍은 해를 가렸다. 잠을 설친 안개가 웅숭거리며 강물을 뽀얗게 덮었다. 휘어내린 하얀 강줄기 머문 틈에 듬성한 산봉우리가 비쳤다. 사진으로 보던 마터호른을 빼닮은 악현산과 주위 삼각 봉우리들이 아득하다. 가난한 웃음을 뿌리며, 가로지른 길을 따라 비에 젖은 마을이 오랜만에 깨어난다. 산에 얹혀 층층이 늘어선 집들이....넉넉한 강가에서 보면 사는 모습이 드러나듯 자연스러웠다. 마을을 나눈 계곡을 따라 또 다른 물줄기가 합류했다. 그 옆을 따라간 무질서한 돌계단을 오른 다음, 어설픈 골목을 두어 번 꺾어 들어가면 나무대문이 나타났다. 페인트 칠이 벗겨져 원래 색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짐작할 수 없다.
철 지난 수국이 문간에 서있었다. 하얀, 탐스러운 꽃덩어리가 달걀 껍질처럼 부서지고 있는 참이다. 무관심하게 지나쳐도 마당에 떨어진 꽃잎은 원망도 없이 흩어졌다. 대신에 이제 막 화사한 몸짓으로 접시꽃이 얼굴을 내민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아침마다 기웃거렸다.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에 가려고.
접시꽃처럼 우아하게, 근방 학교에 다니는 여 선생이 셋이나 기거하고 있었다. 마을은 낯선 이의 출현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나의 아래위를 흘끔거렸다. 후배가 비워 준 방에서 며칠 동안 그림만 그렸다. 천에 나타내는 무궁화라든지....태극기, 금수강산 등 딱딱한 소재의 그림은 학교 단위 어떤 출품작에 쓰인다는 것만 알았다.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마을 어른들은 강가에서 그물을 뿌렸다. 갈길 바쁜 은어들이 햇빛에 하얀 배를 드러내고 묻혀 나왔다. 해가 터져 방이 달아올라 찜통이 될 때쯤이면 아이들이 달려왔다. 아이들을 따라 강가에 가면 어른들이 환하게 맞았다. 그들은 수박 냄새가 배인 은어회를 우격다짐으로 입에 넣어 주었다. 늙수그레해도 깍듯하기만 해 젊은 화가는 송구스러웠다.
마을 할머니들은 마주칠 때마다 소박하게 웃었다. 그네들은 대개 산 너머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몰랐다. 여기서 나서 아무개에게 시집 가선, 평생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이 세상이었다. 볼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촌스러운 질박함도 어느 대목에 가면 어두워졌다. 댐이 세워지면 다음에는, 정겹게 살아온 삶을 바꾸어야 했다. 나랏님들이 하는 일이니....모두 좋아진다니까....따르지만 앞으로가 아득하다. 숨을 쉬는 공기야 벗어난들 다를 리 있겠냐만 품에 안은 땅이 보고 싶을 땐 어찌할건가.
조만간 마을은 물 속에 잠길 것이다. 그때에는 부대낀 것을 모두 버리고 기억 속에만 남겨야 한다. 기억은 그들 육신과 함께 필연코 사라질 것이다. 그래, 정말 보고 싶을 땐 맑은 날 배를 타고 나가 서늘한 물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 봐야지.
조촐한 파티가 벌어졌다. 여 선생들은 밤 늦게까지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실에 꿴 구슬을 쏟아내듯 줄줄 쏟아냈다. 밤이 깊어 사방은 어둠에 잠겼다. 그럴수록 술은 맑다.
'형, 왜 오늘은 울고 싶은지 몰라.'
눈이 그렁그렁하다. 밤이 쉬지않고 달려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는 어느 때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동내 개들이 우렁차게 짖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애써 무관심하려고 애를 썼다. 아침 나절에 보았던 수국 꽃잎처럼 내 젊은 날은 흩어졌다.
꿈을 꾸었다. 흩어진 꽃잎이 연록색 잎으로 뒤덮였다. 그 밤, 내가 넘어 온 길을 따라 세상에 내팽개쳐진 개똥벌레들. 한줄기 빛을 의지하여 나는 세상에 나섰다.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세상으로 꾸역꾸역 나왔다.(2000.7)

Kelly Simonz, Solitu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