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갇힌 길 한 뼘

*garden 2013. 3. 5. 13:57




찬바람에 뺨이 얼얼합니다. 입김으로 손을 녹이고 습관적으로 옷깃을 여미다가는 내버려 둡니다. 웬간하면 견뎌내야겠지요. 봄 냄새를 슬쩍 맡으려면 이런 바람이라도 몇 번 더 맞아야 하지 않겠어요. 어젯밤에는 외출중에 후회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두툼한 외투가 여간 성가셔야지요. 오죽하면 팔걸이에 달고 다녔을까요. 헌데 오늘 바람은 한겨울로 되돌아간듯 시립니다.
조금 전 떠들썩한 자리를 떠올립니다. 사실은 마음 놓고 술 마실 형편이 못되어서요.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재는데 옆에 있던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야, 임마. 인생 뭐 있어?'
이죽거림이 이어지는 게 싫어 술을 한달음에 털어넣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별 것 아닙니다. 옻칠이 벗겨져 까칠한 앉은뱅이 책상에 내 몸집이 딱 맞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덧 황혼녘도 지나 이슥한 밤 시간에 덜컥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버린 세월도 따지고 보면 한순간 한순간을 벼랑 끝에 세우듯 아찔하고 걸음을 쉽게 뗄 수 없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하고 끝났다 싶으면 눈앞을 가로막던 장애물. 감히 모시는 신神은 없지만 눈 질끈 감고 빌기도 했습니다. 과연 이 시련은 그치지 않는 걸까. 다른 이에게도 똑같은 시련이 주어지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등. 헌데 시련이 주어지더라도 거뜬히 밟고 넘어서며 즐기던 일말의 호승심마저 어느 순간 제게 없더란 말씀을 일러주고 싶습니다. 거울에 비친 한 남자의 모습은 힘겹게 달리다가 주저앉은, 그래서 젖은 땀과 눈물밖에 없는, 쓴 술도 마지못해 삼켜야 하는 그야말로 어색한 몸짓이 절규여서 슬픔과 외로움만으로 버티고 있어 차마 그냥 쳐다보기 힘든 지경이었지요.
집에 군식구가 있었어요. 하루 이틀이면 눈 질끈 감고 지나칠 수 있겠지만, 아이가 뭔가 도모한다고 해서 손이 필요하다보니 후배 녀석 하나를 끌고 와 몇 개월씩이나 딩굴었지요. 내색할 수 있어야지요. 그저 내 아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니까, '그려~'하며 넘어갑니다. 남의 식구를 끌고 와 곁에 두다 보니 행여 차별이라도 드러날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제대로 먹이지 못했을까 싶어, 휴일을 앞둔 날이면 지방에 있는 집에 내려가기 전 근처 식당으로 끌고 가 고기에다 술까지 챙깁니다. 어느 때 제 엄마가 건성으로 소리를 칩니다. 나중 이에 대한 비용을 청구할 거라고. 그때까지 손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눈길을 처박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어요. 큰 눈을 치뜨며 뜨악하게 반문합니다.
'꼭 그래야 돼?'
그 한 마디로 평정되어 버렸지요.
이번에는 서울쪽 대학에 다니는 인척 여자아이가 기거할 자리가 마땅찮아 집에 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칫 없는 말이라도 생기고 만들어져 전해진다면, '후유~'
별로 소용하지 않는 짐을 들어냈겠지요. 이 참에 집 안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지도 모릅니다. 그게 말입니다, 어느 때 한가하면 읽어야지 하고서 한 권 두 권 챙겨두었던 책을 허접쓰레기처럼 복도 한가득 내놓았더란 말입니다. 책장이야말로 내놓자마자 누군가 휑하니 들고 가 버렸고.
술을 마시는 중에 맞장구로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제 정신을 드러내 놓은 것이라고. 책 나부랑이가 아니라고 한들 먹히지 않습니다. 다툼 끝에 집을 나가라는데, 울컥하여 내지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짐을 챙기는데 비감합니다. 속옷도 챙기고 당분간 버틸 평상복이라든지, 카메라도 챙겨 두고, 짐이 빵빵하게 늘어납니다. 한겨울 가운데 아직 불편한 다리를 끌고 헤매야 할 곳이 어디인가. 날씨마저 궂어 선뜻 나서기가 힘듭니다. 고민 끝에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진작 잡혀 있던 하루이틀의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잠잠해졌습니다. 그걸도 끝났냐구요. 입 밖에 쏟은 말이 어디 가겠습니까. 인제 걸핏하면 나가라니. 가야 할 곳이라든지 내일이 없어진 지 오래, 지난 책처럼 버려지고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견딜 수 없을 지경입니다. 죽자, 죽더라도 나가서 죽자. 헌데 이 많은 짐을 어디 갖다 놓고 죽어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Edward Simoni, Feuer Tan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