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진혼의 시간

*garden 2013. 3. 19. 14:54





발걸음을 늦춘다. 병원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서두르며 높아진 숨을 가라앉혔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기, 차갑게 주시하며 거리 두기 등을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따르는 발자국 소리로도 알 수 있지만 돌아본다. 아이가 찔끔한다. 돗수 높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옹다문 게 녀석도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를 기다렸다가 매무새를 살핀다. 불빛에 창백해진 표정이 애절해 슬쩍 뺨을 만졌다. 현대건축이 그렇지만 단조롭고 메마른 콘크리트 벽이 주는 정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면회시간이 아니라고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왈왈대는 접수계 안 간호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애써 참는다. 멀리서 달려왔다며 물러날 기색이 없자 말투를 음미하는 듯하더니 마지못해 허락한다.
요양병실 안은 조용했다. 어둑한 조명이 익숙치 않다. 숲속처럼 빛과 어둠만 구별되는 세상. 눈을 껌벅여 동공을 조절하고서야 겨우 어렴풋한 사물. 쪼르르 달려온 병실 간호사는 이미 바깥 소란을 알고 있다. 확인하듯 우리 부자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바로 한가운데 침상으로 안내한다. 가습기를 내내 틀어 놓았는지 습습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의식 없는 환자들. 그 가운데 웅크린 자그마한 덩치를 익숙해질 때까지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환자복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당당하던 기개는 어디 있는가. 한치도 굽히지 않던 고집마저 내팽개치고 눈을 꽉 감은 당신이 비몽사몽 간을 헤맨다. 모포 밖으로 나온, 핏줄이 드러나 앙상한 손을 아이가 맞잡아 토닥거려도 반응 없이.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낯설기만 한 이런 병실에 이렇게 누워 계시게 하다니. 스스로에게 꾸짖듯 억지로 소리를 내보았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보기 난처하다. 한 생을 며칠 새 지나온 듯 쇠약해진 모습을 보자 견디기 어렵다. 한번도 마주 앉아 살가운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말이 무의미하다. 차라리 말 없이도 한 생을 건너갈 수 있는. 안경 너머 근심스런 시선을 던지는 때도 있었다. 때로는 기특해도, 더러는 섭섭해도. 어쩌다가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시던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견딘 시간은 오직 침묵의 연속이다. 이가 망가져 말이 되어져 나오지 않는 바람에 행여나 쫓아가도 소통이 되지 않아 가로늦게 대화를 나누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멀뚱하게 선 우리네가 안타까운지 간호사가 거든다.
'계속 의식이 없으셔서 저희도 걱정이라예.'
'근래 깨어나신 적은 없나요?'
'오시믄서부텀 이랬는데. 뒤쪽 머리카락이 길어 누워 계시는데 불편할까봐서 깎아 드리겠다고 했더니 거절하는 몸짓만 하세요.'
간호사가 허리를 굽힌다. 입을 아버지 귀에 댄다.
'할아버지, 머리 쫌 깎아 드릴까예.'
당신이 고개를 흔든다. 의식이 없는 게 아니었나.
'참말이지예!'
경망스러움이 미워 간호사를 봤더니, 그렇게 반응을 이끌어낸 자신이 대견한지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을 차마 꾸짖을 수 없다. 누워 계시는데 불편하지 않은지,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바깥 바람이나 햇빛을 쬐고 싶지 않으신지 등을 병원에서 모두 알아서 해준다는데. 허둥지둥 달려가 한바탕 넉두리도 쏟아 놓지 못하는 내가 서럽다.

당신을 모시고 북녘 하늘이 보이는 저 길을 달려간 적 있다. 이제 보고픈 이들을 만나고 계신 건지.
















Guido Negraszus, Singapore Calling Par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