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간
장마철 비를 핑게대고 일찍부터 나앉은 술자리. 몇 순배 돌아가자 알콜보다는 후덥지근함으로 정신 없다. 젠장, 이른 시각이라 에어컨도 켜놓지 않았잖아. 버티자니 등줄기가 후줄근하다. 참다 못해 한소리 꺼내려는 상대를 막았다.
'이대로 있어봐. 아무려면 큰 탈이야 있을라구.'
의아해 하는 걸 한눈 찡긋하여 묵살했다. 그러고보니 참고 견디며 한 세상을 보냈다. 사는 재미를 느낄 만한 적이 있었던가. 함께한 이는 하나 더하기 하나의 정량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방금 갖다 놓은 부침개에서도 후끈함이 후욱 끼친다. 젓가락으로 난폭하게 찢었다. 추적거리던 비가 별안간 슬라브 지붕을 와당탕 두드리기 시작했다.
철벅철벅 걷는 길. 아무렇게나 나 있어도 예사롭게 여기면 안된다. 누군가에겐 절체절명의 선인 논둑 진흙길에서 고무신이 미끈거린다. 신발 안 발가락을 꼼지락댄다. 중심을 잡으려고 해도 쉽지 않다. 맨발이 나을 지경이다. 저만큼 앞서가던 할머니가 돌아본다. 고의적삼이 홈빡 젖어 늘어진 젖가슴일랑 감추지도 못하고선. 머리에 인 바구니에서 삐죽 내민 오이 하나를 꺼내준다. 장대비가 그어 빗물이 장막처럼 드리운다. 뽀얀 물보라가 무논을 가로질러 건너간다. 맛도 느낄 수 없는 물외를 썽퉁썽퉁 잘라 먹으며 따라 걸었다. 빗물이 낼름낼름 입 안에 들어왔다. 똬리 끈을 이로 물어 말은 않지만 잰걸음을 떼는 할머니 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내일은 종일 하늘만 내다보며 미뤄둔 집안일을 처리할 요량이다.
남은 이모들에게 하나, 둘 날개를 달아주자 미련 없이 훌훌 날아가버려 별 수 없다. 할아버지야 양반이니 농사일이나 허드렛일을 할 수 없고, 머슴들도 하나둘 내보낸 마당에 할머니 혼자 땅마지기를 부치기가 버겁다. 결국 외삼촌이 이것저것 정리하고 어른들을 불러 올렸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기에 그런가 했지. 새로운 생이 막막하다. 눈만 뜨면 마주치는 하고많은 시간에 진작 질렸다. 사람을 대하기도 무섭다. 딱히 짚어 말할 수 없는 벽이 곳곳에 있다. 그게, 비로소 머리가 굵은 우리가 보일 때에야 맴이 놓인다.
'야야, 원아. 시간 있나?'
'네, 왜 그러세요?'
'내사마 요가 딱 싫어도 방법이 없제.'
'그래도 할머니 이렇게 가까이 모시니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 글 좀 갈치도고...'
이름자조차 쓸 필요 없던 당신, 푸른 안산만 보여도 가슴이 트이고, 검붉은 흙냄새만 맡아도 푸근했는데, 여기서는 콧딱지 만한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이들 군것질거리를 사면서도 긴장한다. 상대 눈빛을 보고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는 거스름돈을 챙겨야 했던 애환을 꼬치꼬치 꺼낸다. 모든 일이 간단치 않다. 본의 아니게 궁색해진 지난 생이 버겁다.

Ludovico Einaudi, Primav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