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제출 일자가 임박해 여념 없다는 아이. 책을 앉은키만큼 쌓아 두어 뒷모습이 갇힌 섬처럼 애처롭다. 지나치려다가는 한마디 내지르지 않을 수 없다.
야야, 한 줄 글귀라도 더 짜내야 할 녀석이 집중은 커녕 시끄러운 음악은 왜 틀어두냐?
소리 질러도 듣는 둥 마는 둥 음악을 들어야 더 잘된다니, 믿어야 하나.
해를 구경 못한 지 이미 십여 일. 장맛비가 유난스럽다. 기록적 폭우가 여기저기서 난동을 부려 심상치 않다. 물에 잠긴 채소밭이나 과일을 연신 뉴스에 비추더라니. 빗길에 들른 마트에서는 실정을 잘모르는 내가 봐도 비싸다는 걸 실감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안먹을 수 있나. 복숭아 한 상자를 덜컥 사 왔겄만 네 맛도 내 맛도 아니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창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가 우울하다. 세상이 물에 잠길 리야 없겠지.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작정을 하자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 구석에 던져 둔 배낭을 꺼내 뒤집어 떨고 다시 챙긴다.
필요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거참. 입맛을 다신다. 내리는 빗줄기와 연꽃, 개구리 등 요청하던 사진 목록을 다시 떠올린다. 대리석 바닥을 배경으로 튀는 빗방울을 잡을까, 아니면 계단 아래쪽에서 빛 내리는 위쪽으로 앵글을 두고 역광으로 비 내리는 모습을 찍을까. 장소를 찾고 구도나 대상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좀체 시간이 나지 않아 안달했다. 좀이 쑤시는 몸이야 둘째치고라도 곰팡이가 내려앉듯 쿰쿰한 머릿속은 어떡하나. 그리고 작정하여 일어서자 상황이 안맞다. 비는 그쳤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햇빛을 즐기러 너도나도 쫓아나와 붐빈다.
축제 같은 여름은 낭만적인 생각일 뿐이다. 눈을 뜰 수 없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 끓어오르는 열기로 한낮이 아득하다. 세미원은 가라앉은 습기와 흙탕물, 인파의 소음으로 부대꼈다. 눈이 흐릿하고 목도 텁텁하다.
칠월 탄생화라는 연蓮은 미처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인가 팔월 중순경에서야 기나 긴 꽃대에서 터뜨리던 환한 뭉텅이의 꽃잎을 생각해냈다. 그게 밀양이었던가. 풍요와 행운, 번영이나 장수를 의미하는 연은 삼천 년 전 씨앗에서 싹을 틔운 기록도 있다. 오직 발아를 꿈꾸며 기다린 오랜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듯하여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물 아래 바닥에 터를 잡고 싹을 틔워 수면 위로 잎을 펼치며 신기하게도 물뿌리개 주둥이를 닮은 열매를 맺는다. 대략 이맘때 꽃을 피우는데, 아침에 피운 꽃을 낮 세 시경에는 오므린다. 이러기를 사흘쯤 반복하다가 진다. 잎사귀에 있는 나노미터 크기의 돌기 때문에 물이 괴지 않는데 이를 로터스 효과라 한다. 가을 무렵이면 땅 속에 연뿌리가 생긴다. 물부용이나 불어선不語仙, 지견초池見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탁한 물에서도 청정한 꽃을 피우는 모습을 부처의 지혜나 상징으로 우러러보기도 한다. 불가에서 가리키는 연은 수련睡蓮이다.
세미원에는 입구에 삼각대를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그 때문에 툴툴거리는 이가 많다. 하지만 정작 안에는 삼각대를 받히고 사진을 찍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어리둥절하다. 삼천 원인 입장권으로는 나중 농산물이나 시원한 차나 커피로 교환할 수 있다.
Richard Yongjae oneill, La Romanes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