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하는 길 "아이고, 늦은 시각에 이리 폐를 끼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괘념치 마세요." 일행을 데려다 주는 바람에 이리저리 돌았다. 나중 낯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는데 방향 감각이 없다. 밤 늦은 시각이어서인가. 다시 네비게이션을 작동시키기도 귀찮다. 어림짐작으로 더듬어 나오.. 不平則鳴 2016.01.12
유월 색 스스로 물을 찾지 못하는 꽃나무들. 외딴 섬 같은 화분에서 축 쳐져 있다. 깊은 흙 냄새를 잊은들 지울 수 있을까. 오늘은 물주기를 그만 두자. 오랜만에 뿌리는 비. 습기 먹은 바람이 끼치는 눅눅함을 반가이 맞아들였다. 때로는 선한 바람이 꽃을 키우는 게야. 아직 꽃나무 같은 우리 꼬마는 한밤중에.. 不平則鳴 2011.06.23
꽃과 바람 사람과 사람 사이란, 어느 때 엇나가면 걷잡을 수 없다. 요즘 지각이 잦아요. 조금 먼 거리에서 출퇴근하는 사무실 아가씨. 늘 정시를 조금씩 넘겨 지각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두어 번 그런다면 눈 감아 줄 수 있지만 상습적이라 참을 수 없다. 눈을 부라렸더니 기어들어가는 소리이다. 변명거리도 .. 不平則鳴 2011.04.25
정월 안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는 처음과 끝. 끝은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만 처음은 끝을 향해서만 달린다. 처음은 느긋하고 끝은 숨가쁘다.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시점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역시 해의 막바지는 시끌벅쩍하다. 발굽 갈라진 가축만 걸린다는 구제역口蹄疫. .. 不平則鳴 2011.01.04
어두움에 딩굴어 오후 내 뭉그적대는 서점 안. 참고자료를 구할 참이었는데 엉뚱한 책만 뒤적인다. 벌써 서산머리에 해가 뉘엿거릴게다. 그래도 흡족하다. 풍족한 식사 후에 달디 단 후식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감기는 문장들. 어떤 대목에서는 소리내 읽으며 감탄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는 책먼지. 정수리 안쪽을.. 不平則鳴 2010.10.13
빛이 있으라 어둠을 더듬으며 나아가자니 상어 아가리 안인 듯 두렵기 짝이 없다. 여기가 어딘가. 답답함을 빌미로 소리라도 지르며 해악을 끼칠래도 무어 형체가 있어야지. 혼돈스럽고 공허하여 심연의 덩어리만 흐물흐물 널브러진 곳. 그때 빛이 내려오시니 떠오르는 정물들. 제대로인 세상에서 비.. 不平則鳴 2010.08.10
오직 봄을 찾아 승강기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해끔한 얼굴. 선녀처럼 미끄러져 들어오며 목례를 날린다. 잘 익은 과일같은 아랫층 여자. 냉큼 들어와선 뒤에서 돌이 되었는지. 뒤통수가 간질거린다. 달콤하고 세련된 냄새가 폴폴 나 뒤엉킨다. 무심코 인사를 받았더라면 무안할 뻔했다. 사방 가지를 벋는.. 不平則鳴 2010.03.16
강아지와 하늘과 길과 우여곡절 끝에 집에 들인 개 한 마리. 진돗개 혈통이라지만 글쎄. 화단 한쪽에 매어 둔다. 이건 순둥이여서 누가 와도 짖을 줄도 모르고. 하늘까지 닿은 떡갈나무 아래, 꼬리를 말고 숨 죽이고 있다가 담장 아래 노란 햇빛이라도 슬슬 내려오면 그제서야 주변 동정을 살피며 거동한다. 우.. 不平則鳴 2010.03.05
북한산의 봄 낮은 곳에서 꼬물거려도 평온해야지 싶었는데, 걷기 시작하자 걸음이 차츰 빨라졌다. 이래선 안돼, 상념이 많아져선. 그렇찮아도 주변 북적이는 인파에 정신이 산만해져 있었다. 제자리에 선다. 배낭 끈을 잡아당기며 덩달아 들쑥날쑥해진 숨을 조절한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시끌벅쩍 지나는 사람들 .. 不平則鳴 2009.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