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75

그대 꿈자리

무진장 가을 속 한량없다가도 친구들과 함께 왔다며 인사하는 아이 때문에 부산스러웠는데 깨어나서야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나비 떼에 둘러싸여 떠나는 뒷모습이 그대, 마지막이었구나! 앞뒤 절벽에 끼인 듯 숨조차 못 쉰, 짓이겨진 살에 박힌 강철 같은 뼈다귀여! 밤 새 울어댄 귀뚜라미 소리인들 애닯지 않았을까 소슬바람에 흩날린 낙엽보다 못한 존재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며 밝게 웃었어도 사랑 한줌 담을 수 없는 그대들 어둠 속에서 꿈을 꺾었으니 그 길 어이 밟을 수 있으랴 비탈져 흘러내린 이태원 길, 다부룩한 잔디로 덮어 두어라 다가올 새 봄, 짓밟힌 꿈 한조각이라도 싹틀 수 있게 - 이태원 참사를 애도합니다! Giovanni Marradi, Shadows

햇빛마당 2022.11.07

배롱나무 꽃 피우다

연지곤지로 단장한 이모, 눈자위가 발갛다 어젯밤 소쩍새 울음 잦아들 때까지 흐릿한 호롱불 너머 소곤거리더라니 괜히 밉기 만한 이모부 될 이가 사모관대를 만지며 불콰한 목소리를 낸다 지가 호강시킨다고는 몬하지만 걱정일랑 않게 하겠심더 조막 만한 당나귀 타고 우쭐대며 세상을 얻은 듯 신 난 신랑 늙으신 어미애비 두고 떠나며 노심초사하는 신부는 꽃가마 안에서 옷고름만 꼭 쥐었다 떠들썩한 사람들을 헤치고 이미 동구 밖까지 나간 행렬 미운 심보로 올라선 배롱나무 위에서 발을 구르는데 간지럽다며 숨 넘어가는 나무마다 뜨거워진 속내 감추듯 붉디붉은 꽃구름 내려 매미소리 여릿한 한여름 오후를 밝혔다 Sergey Grischuk, Rain...Rain(А дождь всё льёт)

햇빛마당 2022.08.04

함께 걸어갈 길 앞에서

- 요즘 제가 불면증이 심합니다. 하루이틀 날밤을 새는 건 예사이고, 얼마 전에는 삼일 밤낮을 꼬박 샌 적도 있습니다. 이래선 안되겠지 싶어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지' 하며 자리를 깔고 누운 찰나 아이들이 왔습니다. 함께 나가 피부샵에도 들르고, 머리 염색도 하고, 목욕하고 이발도 했습니다. 이렇게 호박에 줄이라도 치면 새 신랑처럼 훤해질 수 있을까요! 오늘 여자이름인 남자 **이와 남자이름인 여자 **이가 오래도록 이어온 귀한 만남 끝에 결혼하는 날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허락을 구할 때부터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하필 코로나로 제약이 심한 이때 결혼을 해야 돼? 하구요. 애써 위안도 가집니다. 비혼주의자들이 넘치는 판국에 두 사람이 가정을 꾸리겠다는 뜨거운 열정과 위대한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도 싶습니..

햇빛마당 2021.11.14

바다로 간 동백

친구와 부르던 노래이듯 내내 웅얼거리는 파도소리를 음미했다 밤 늦은 시각 여길 어이 기어들었을까 붉은 등 흐릿한 동백여인숙 나무계단을 꿍꽝대는 불협화음 동박새처럼 조잘거리는 계집애들 성가신 소리 참, 처마를 짓이기는 빗소리도.... 꿈도 없는 밤이 그래서였나 양치질하다 말고 게워낸 지난 밤을 간신히 추스르며 나선 여인숙 앞 피 맺힌 아우성 지우고선 꽃무덤 봉긋한 아침 White Water, Celtic Spirit

햇빛마당 2020.08.02

그대에게 가는 날

이런 날도 있지 않나요? 바쁜 일과 속 창 밖에 준 눈길 거기 푸른 하늘과 눈부신 꽃을 보다가 눈을 감습니다 오랜 동안 잊고 있던 당신이 왜 보일까요 바깥으로 나갑니다 해묵은 시간 켜켜이 재인 모래성을 파헤친들 헛일일 것입니다 괜히 발부리로 땅을 헤집어 봅니다 풀잎 이슬처럼 해맑은 얼굴 막 피어난 꽃처럼 아릅다운 자태 그대에게 가는 길이 주어진 사명처럼 어깨를 무겁게 합니다 어떤 장애가 있어도 넘어서야 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디딤돌 없는 허공을 지날지도 흘러내리는 물길은 지난 모퉁이쯤에서 본 것 같다고 합니다 거침없는 바람은 저 앞 어딘가 있지 않냐고 합니다 바삐 걸어야 하겠지요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우리 만남을 기대하는 게 미몽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담아둔 사랑을 찾는 대신 엉뚱한 일에 매달릴..

햇빛마당 2020.04.15

여름과 가을 사이

애월 오래된 마을 한쪽에서 장작처럼 붉게 타올랐다가 한잔 술에 쓰러져 어둠에 묻혔다 발 아래 철썩이는 파도소리 절벽처럼 아슬한 간이침대 받침이 낯설어 한낮 더위에 해제된 온몸 신경들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초생달처럼 구부러져 삐걱거리다가 새벽 한기에 재채기를 연속으로 뱉었다. 그래, 여름은 갔어 누가 뭐래도 가을이야! 어느 때인가 가을을 꿈꾸었을 슬픈 두 눈을 떠올렸다 그 가을과 다르겠지만 주어진 가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지 십일 월엔 마구 뛰어다니겠다고 다짐했다, 내 굳건한 두 다리로 행장도 넓히리라고 작정했다, 생각 갈래들로 그때마다 덧채워야지 늘어진 오후 햇빛을 느긋하게 받으며 내 행동에 대해 실망스러웠던 까닭도 따져봐야지 익숙한 이들과 강화도에서 만났다 깨나는 갈무리된 시간들 까칠하고 메말라..

햇빛마당 2019.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