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29

라르고로

거슬리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영혼을 편안하게 만드는 소리도 있다. 한 며칠 세상이 빙하시대에 든 듯 추웠다. 그게 어느새 풀려 한낮 햇살이 따끈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우중충한 교실에서 아이들이 다들 쫓아나왔다. 工자 모양으로 이어진 본관과 별관에서 뚝 떨어진 음악실이 있다. 하얀 페인트 칠이 눈길을 끄는 이층 건물. 다음이 음악시간이어서 부담이 없다. 때가 되면 방음 잘된 이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이런 볕도 오랜만이지. 냉기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는 벽에 너도나도 성냥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었다. 나중에 나타나 슬금슬금 끼어드는 아이들이 있어 은연중 좌우로 힘이 뻗힌다. "야, 밀지마레이!" "니도, 햇볕 좀 가리지 말고 저리 비키라" "헛, 니가 소크라테스가?" 개중에 한둘이 언성을 높이다가 장난질 깃..

發憤抒情 2021.01.30

겨울 이야기

장롱 가장 아랫칸에 있는 요와 이불을 꺼냈다.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수였다. 빨갛고 커다란 꽃무늬가 중첩되어 있는데, 금색 실이 가장자리마다 보기 좋게 수놓여져 있는 화려한 금침. 이제 아무래도 괜찮아. 한숨 자고나면 거뜬할거야. 아랫목 온기가 달아나지 않게 요를 여미고 이불을 폈다. 이불 위에서 방방 뛰는 아이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꽃 위에 나비처럼 앉았다가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이 아득한 곳에 있는 듯 여겨졌다. "남희야, 동생 델꼬 이리 온나카이" 기진한 제 어미 목소리일랑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간신히 아이들 팔을 하나씩 잡아 이불 안에 구겨넣지만 이내 쫓아나가는 귀신들. 무겁고 답답한 게 싫을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남희 엄마는 묵직한 이불을 굴레삼아 눈을 감았다. 가슴이 눌려 이..

發憤抒情 2020.12.28

달곰 시간

야멸찬 스피커 음. 진작 훈련된 우리가 마킹펜을 놓자 답안지를 거둬간다. 그렇게 끝난 시험 첫 시간. 하나둘 일어난 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 바깥에서 고대하던 가족이 들고 나간 시험지를 받아 가채점할 것이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도 큰일이라고, 돌아온 아이들이 저마다 가족이 건넨 음료나 과자를 받아왔나 보다. '후루룩'거리고 '쩝쩝'대는 소리가 거슬린다. 고개를 숙여 딱딱한 책상에 이마를 댄다. 끓어오르는 마음이라도 가라앉혀야지. 이른 아침에 학교 앞까지 택시로 데려다 준 아버지는 내 등을 툭툭 쳤다. "시험을 친다는 건 비로소 삶이 한단계 위로 올라간다는 거니 부담없이 치르고 오너라." 얘기 끝에 헛기침 한번 뱉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기온이 뚝 떨어져 있다. 둘..

發憤抒情 2020.12.03

그 여름 후에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신경을 긁는 날카롭고 긴 소리 다음에 이어지는 적막감. 어느 집에선가 개가 요란스레 짖었다. 짙게 들이찬 어둠이 들썩이도록. 어제는 끝났으며 오늘은 네 시간 뒤에야 시작될 것이다. 모든 게 정지된 시각. 아랫목에 기대앉은 채 꾸벅꾸벅 졸던 어머니가 가위에 눌린 듯 놀라며 일어섰다. 부엌으로 내려가 연탄불을 확인한 다음 다시 들어왔다. "에효, 벌써 하루가 지난거야!" 열린 아궁이만큼 입을 벌리며 두 팔을 맞잡아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켰다. 순간 귀를 기울였다. 골목 바깥쪽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고개를 저었다. 저건 아냐. 무게감이 떨어지고 어딘가 가벼워. 차 한잔 끓일 시간이 지났을까. 드문드문한 구둣발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이번에는 틀림없어. 통금 사이렌이 ..

發憤抒情 2020.11.03

남희네

우리가 학교에 가기도 전인 시각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작게 말하는 법이 없다. 너도나도 소리를 질렀다. "이걸 왜 여기에 쌓아뒀나? 그리고 개수가 모지라는 거 같은데." "......" "어이 조씨, 사람들 좀 불러요." "다 오라고 합니까?" 작업복 차림인 사람들이 벌써 여기저기서 뚝딱댄다. 개중 한둘은 화단 구석을 파헤치다가 결국 담장도 허물었다. 십몇 년을 살아도 데면데면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자기네 마당을 가로지르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쯤되면 쫓아와 삿대질해도 모자랄 판인데, 미리 일러 놓았는지 눈길 주다가는 반응 없이 들어가 버린다. 평탄정지 작업부터 했다. 이튿날째에는 자재가 들어와 쌓였다. 집은 이미 난장이어서 온갖 사람이 드나들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바쁜 어른들 틈을 슬금..

發憤抒情 2020.10.23

푸르름의 끝

"느그 집이 저기네." "맞아. 동네서 가장 큰 나무 두 그루가 여기서도 보여." 심심할 적마다 올라가는 동네 건너편 동산. 아이들과 경쟁하듯 뛰어올랐다. 한켠에 모여서서 동네를 어림짐작한다. "우리 사는 데가 손바닥 만하네." 모여 사는 모습이 별것 아니다. 어찌보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곳. 그래도 올망졸망하게 늘어선 곳은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다. 거미줄처럼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길. 바닷가 바위 위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지붕으로 이어진 세상. 이곳저곳으로 통하는 수많은 길. 아마 누군가는 바쁜 걸음으로 골목을 나서겠지. 골목 밖 가게에서 또 다른 이는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있겠지. 그 앞 약국 안에서 약사 아주머니는 하얀 얼굴에 안경을 고쳐 쓰며 지나는 사람들을 살필 거다. 짤랑대는 엿장수 가위..

發憤抒情 202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