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겨울 이야기

*garden 2020. 12. 28. 13:20






장롱 가장 아랫칸에 있는 요와 이불을 꺼냈다.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수였다. 빨갛고 커다란 꽃무늬가 중첩되어 있는데, 금색 실이 가장자리마다 보기 좋게 수놓여져 있는 화려한 금침. 이제 아무래도 괜찮아. 한숨 자고나면 거뜬할거야. 아랫목 온기가 달아나지 않게 요를 여미고 이불을 폈다. 이불 위에서 방방 뛰는 아이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꽃 위에 나비처럼 앉았다가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이 아득한 곳에 있는 듯 여겨졌다.
"남희야, 동생 델꼬 이리 온나카이"
기진한 제 어미 목소리일랑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간신히 아이들 팔을 하나씩 잡아 이불 안에 구겨넣지만 이내 쫓아나가는 귀신들. 무겁고 답답한 게 싫을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남희 엄마는 묵직한 이불을 굴레삼아 눈을 감았다. 가슴이 눌려 이불이 주는 안락함이 느껴진다. 이를 위안삼아 가라앉은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바람이 문풍지를 떨어울리다가 잠잠해진다. 꽃이 피어 천장까지 닿았다가 내려오며 한들거린다. 어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저만큼 추운 바깥에 귀를 기울이는 남희가 보인다. 남규는 솜을 덧댄 겨울바지를 껴입고 제 누나 눈치를 보며 여닫이 문을 열려고 했다. 남희 엄마가 웅얼거렸다.
"그카지 말고 이리 온나아!"
"엄마! 눈 왔데이."
남희가 아랫목으로 이동하며 작은 소리로 소근댄다. 남규도 제 누나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남희 엄마가 이불을 쳐들자 남규가 제 엄마 품으로 들어갔다.
"봐라, 손이 이래 차가우믄 우야노? 밖에 나가문 안된다."
꼬물거리는 아이를 안아 포박하듯 이불을 들씌웠다. 하지만 남규는 이내 품을 벗어난다. 그래도 남희 엄마는 눈을 뜨려고 하지 않았다. 코가 맹맹하다. 투레질하듯 거친 숨을 사정없이 뱉어냈다. 눈두덩이를 내리누르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깊은 잠이 이끄는 대로 가라앉았다.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좋아. 그러니 너희들도 엄마 옆에서 얼릉 자렴. 무의식중에 손을 흔들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허긴 내가 잡으련다고 운제 잡히는 게 있더냐. 그래도 그래, 너희들마저 이러믄 안되지, 안돼.
소복하게 눈이 내렸다. 장독대 위 눈을 쓸어 손아귀에 쥐어보다가 남희를 보았다. 어느새 바깥으로 나서는 내 기척을 눈치챘을까. 손에 잡힌 눈을 뭉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는 욕심을 부려 눈덩이를 크게 만들었다. 작정하고는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와서는 손을 녹이며 사방으로 눈덩이를 굴렸다. 남희가 나를 따라다니며 거들지만 이내 막았다. 작은 소동에 옆방 윤미도 나와 합세했다.
"안돼야. 너희들은 저리 가. 오빠야가 눈사람 맹글어 줄게.
한나절이나 걸려서도 눈덩이는 좀처럼 커지지 않았다. 그래도 제법 그럴싸해진 꼬마눈사람을 보고 아이들이 환호했다. 눈사람이 겨울 내내 우리 집 장독대에서 버티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사람이 영혼이 빠져나가듯 허물어진 다음 다시 눈이 내렸다. 아이들이 저번처럼 눈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아, 구래. 참 잘됐다. 봄 되기 전에 나가야겠네."
난데없는 어머니 목소리에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도 윤미 아버지가 회사 사택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가족이 따라간다는 말인 듯했다. 어머니와 윤미 어머니가 목청을 높여도 미동 없는 남희네. 수다를 그친 어머니가 남희네 방을 두드려본다.
"뭐하노, 밥은 뭈나? 이리 잠만 자서야 우야노. 일어나서 아이들도 챙기고, 청소도 좀 해야 안되나!"
이불 속에서 웅얼웅얼대는데 말이 명확하지 못해 잘들리지 않았다. 부리나케 부엌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수북하게 뜬 밥을 쟁반에 올렸다. 몇 가지 반찬 나부랑이와 국을 담아 남희네로 갔다.

방과 후에도 나는 상훈이와 정식이와 어울렸다. 션 코네리가 나오는 '007' 시리즈가 개봉될 때면 만사 제치고 쫓아갔다. 정통 서부극이나 왕우, 로례 등이 나오는 무협물도 우리 흥미를 자극했다.
"이번에 너네 형이 온다면서?"
학교 졸업반이어서 배를 타고 세계일주 중이라 했다. 기착하는 곳마다의 소식을 전해오는데 그게 부럽다. 갈증을 해소하듯 정식이 형 소식을 들었다.


















Beth Anne Rankin,
I Remembe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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