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영혼을 편안하게 만드는 소리도 있다.
한 며칠 세상이 빙하시대에 든 듯 추웠다. 그게 어느새 풀려 한낮 햇살이 따끈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우중충한 교실에서 아이들이 다들 쫓아나왔다. 工자 모양으로 이어진 본관과 별관에서 뚝 떨어진 음악실이 있다. 하얀 페인트 칠이 눈길을 끄는 이층 건물. 다음이 음악시간이어서 부담이 없다. 때가 되면 방음 잘된 이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이런 볕도 오랜만이지. 냉기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는 벽에 너도나도 성냥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었다. 나중에 나타나 슬금슬금 끼어드는 아이들이 있어 은연중 좌우로 힘이 뻗힌다.
"야, 밀지마레이!"
"니도, 햇볕 좀 가리지 말고 저리 비키라"
"헛, 니가 소크라테스가?"
개중에 한둘이 언성을 높이다가 장난질 깃든 드잡이질을 하느라 엉키기도 한다.
"에잉,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묵었나. 우째 저런 팔불출하고 한 반이 되었노?"
저만큼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음악선생이 나타났다.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고 찌푸린 낯을 본 아이들이 못본 채 시선을 피한다. 밝고 환한 이런 햇살이 얼마만인데. 이를 뿌리쳐야 하다니. 몇몇은 진작 옆 계단을 통해 음악실로 올라갔다. 하지만 점심 먹고 난 다음 나른함마저 느껴지는 이 한가로움에서 벗어나기 싫다. 아쉽게도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교정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인제 흔적 없다. 음악선생이 오늘은 무언수행중이신가. 가슴 앞에 한쪽 손을 올리고는 손사래 치며 아이들을 쫓았다. 덩치 큰 놈들이 변성기에 든 걸죽한 목소리를 내며 괜히 뻗댄다.
"샘요, 먼저 올라가이소!"
한 녀석이 용기를 내 소리쳤다. 으음, 이게 뭐지. 뒷골목 건달 같은 말투에 음흉한 생각을 덧붙이며 표정을 감추고 키들댄다. 이미 사춘기에서 접어들어 별별 생각을 다하는 녀석들 눈이 게슴츠레하다. 학교에 여 선생이라고는 둘뿐인데, 금테 안경에 늘 쌀쌀맞은 표정으로 무장한 키가 작달막한 미술선생에게야 애초부터 까불 수 없지만 늘씬한 키에 여성성을 강조하는 스커트 차림인 음악선생이 오늘따라 만만하다. 더구나 이층으로 오르는 바깥 계단? 아흐흐! 막돼먹은 아이들처럼 치마 입은 선생을 먼저 올라가라니. 처음에는 우스개로 받았는데, 군중심리까지 더해져 '우우'거리기도 하니 난처하다. 이러다가 저 심약한 음악선생이 누군가를 부르면 어떡하지? 이런 소동을 파훼하기 위해 유도선생이라도 '짜잔!' 나타나면 큰일인데. 이미 수업시간이 한참 지났을걸. 이 웅성거림을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안돼. 우리도 그렇지만 마찬가지였을거야. 허공에 걸린 줄타기라도 하듯 용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아이들을 달래 음악실에 몰아넣고 치마 뒷단을 갈무리하여 들어온 음악선생. 화끈해지는 낯을 감추기라도 하듯 슬쩍 허공을 노려보았다. 다행인 것은 우발적인 아이들 난동에 대한 질책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앞자리 선한 녀석들은 소동을 일으킨 아이들에 대한 섭섭한 눈길을 감추지 않았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필요했겠지. 음악시간은 감상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것가지 바라지 않았는데 최상이야. 아이들은 좋다. 이 기회에 노곤함이라도 풀어야지. 슬쩍 눈 감고 잔들 어쩌겠어. 개중에는 대놓고 책상 위에 팔을 올려 둬 머리를 고인 채 눈을 감는 간큰 녀석도 있다. 헨델(Handel)의 오페라 '세르세(Xerxes)' 중 장중한 '라르고(Largo)'가 울려퍼진다. 쉬는 시간 말미의 소란과 시끌벅쩍한 분위기를 지우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간지럽힌다. 영혼이 떠올라 허공을 노닐었다.
골목 안쪽 명희네를 어머니는 싫어한다.
"그 여편네 볼살 바라.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잖아! 아이구, 무시라..... 손해는 항 개도 안볼라카고."
명희 어머니는 살집이 많은 편이다. 금테 안경 너머 시선을 마주치면 언뜻 사나움이 느껴진다. 콜드크림을 바른 하얀 피부가 번들거린다. 이런저런 말을 빌리자면, 목돈이 필요한 어머니가 두어 번 쫓아갔겠지. 명희 엄마가 주름잡힌 턱이 떨릴 만큼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당신한테 그 비싼 이자를 받으면서까지 돈을 융통시키고 싶지 않소 하는 예의는 묵살될 수밖에 없다. 이 여자가 나를 만만하게 본다는 거지. 분기를 감추고 돌아선 어머니.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 중에 명희네가 등장하면 치를 떤다.
"돈놀이하는 사람들 앞날이 안좋다는 거 내 장담한데이. 그기 반다시 후손 앞날이 막히든지 후환이 있다카이."
그런 어머니가 웬일로 작정하고 계를 했다. 동네 여자들 중 딱 맞는 사람하고만 엮이고 싶은 게 속내지만 그게 쉬운가. 곗군이 모자라 생각지도 않던 이도 꼬여들었다. 계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몇 달 잘 굴러갔겠지. 뒷번이어서 손해볼 일 없는 어머니에게 누군가 달라붙었다. 이런저런 정을 나누다 보니 처음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 지나는 동안 인사성 밝고 붙임성 좋은 여자를 뿌리칠 수 없다. 그리고 어머니가 곗돈 탄 날, 진작 작정하고 가족을 위해 계획한 바를 실현할 찰나 조씨네 아주머니가 감언이설을 앞세우고는 고래 심줄 같은 어머니 돈을 빌려갔다. 그게 해도 넘겨서는 이제 받을 일이 감감하다. 한탄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만나면 멱살을 쥐고 이판사판 엎어버리리라 다짐하지만 그때뿐. 미꾸자리처럼 빠져나가는 나쁜 여자 얘기를 하루에도 열두 번을 더 들었다.
작전을 바꾼다. 아침 식전에 그렇찮아도 정신없는 내게 특명이 떨어졌다.
"여기저기로 가면 낡은 파란대문 집이 있능기라. 그집에 들어가서 왼쪽 옆 벽을 따라가면 쪽문이 나오는데 그 두 번째 방. 거기 사는 입술이 얇은 여자가 바로 조씨넨데, 니가 함 가보그레이. 아무래도 듬직한 남자가 가문 좀 낫겠지."
본의아니게 이른 아침이나 혹은 저녁 늦게 내가 조씨 여자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사실 내가 감당할 수 없다. 너댓 번 허탕치고 두어 번 만난 조씨 여자는 감히 윽박지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번은 학교가 파한 다음 집 근방까지 쫓아온 친구들과 모여 있는데, 앞을 지나가는 여자를 보았다.
"엇, 조씨네잖아."
이 저녁 어디를 다녀오는 걸까.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고 싸구려 한복 차림으로 잰걸음을 치는 여자. 어머니 당부대로라면 당장에 목덜미라도 붙잡고 빚 독촉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구차한 핑게를 대고 친구들과 헤어진 다음 집에 가서, 막 등이 켜지던 가로수 아래서 내 앞을 지나간 여자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어머니가 득달같이 쫓아나갔다.
휴일이다. 이게 얼마만이지. 식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인적 없는 집에서 혼자 딩굴었다. 오늘 같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겨울이 끝났을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에는 바깥 공기가 차갑다. 아니, 아직 겨울이라고 해도 괜찮아. 허공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은연중 귀 기울이며 바람소리를 따라가다가는 포기했다. 안방 아랫목에 누웠다. 라르고의 선율을 떠올렸다. 느리고 장중한 천상의 소리를 되새기며 이불 속에서 발을 꼼지락댄다. 어머니가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들이 달그락댄다. 새끼 안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천장 무늬와 벽지 무늬가 빙글빙글 돌았다. 조금씩 신경이 해체되었다. 밥그릇 안에 든 밥처럼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데, 바람 때문일까. 문이 소리를 낸다. 아니야, 무슨 소리일까?
"계세요?"
"......!"
'덜컹덜컹'
조심스레 몸을 폈다. 어깨를 펴자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났다. 대청쪽이 아니고 부엌쪽 문이 덜그럭거리다가 열렸다.
"응?"
"어머, 학생 혼자네!"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린다. 조씨 여자가 아닌가. 부엌문쪽에서 고개만 디밀고 두리번대던 여자가 디딤대를 밟고 방에 성큼 들어선다.
"방이 따신가?"
내가 누운 이불 안으로 여자가 옹송거려 쥔 두 손을 들이밀었다. 얼른 다리를 당기며 내가 일어났다.
"어무이는 어데 가셨노?"
"엇, 지두 모립니다."
"그래? 함 뵐라캤더이...."
"그렇찮아도 마이 찾으시던데, 계실 때 함 오이소!"
"아아, 그래야지예."
갑자기 여자가 말을 높여 당황스럽다. 다시 지분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새 주저앉은 조씨 여자가 냉큼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꾸물대며 방 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어른이 안계셔서 그만 가시지예. 낭중에 꼭 오시고."
"우짜지예? 하필이면 안계셔서."
여자가 미적대며 일어서자 묘한 냄새가 풍겼다.
조씨 여자가 사라지고 허물 벗은 뱀처럼 남긴 지분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 눈을 동그랗게 뜬 남희 엄마가 서있다.
"뭔 일입니꺼?"
"그 여자 오데 갔노?"
".....!"
내가 영문을 알아채기도 전에 남희 엄마가 방 안에 들어서더니 조막걸음을 걸어 부엌문까지 열어본다.
"잉, 이게 대체....?"
내 말에는 아랑곳없이 얼굴이 상기된 남희 엄마가 나를 요모조모 뜯어본다.
"사람이 없다카는 데도 굳이 들어오는 여자라니. 미쳤따카이."
씩씩대는 남희 엄마가 더 이상하다, 참나.
"자아, 고대로 계시고.... 이쪽 보이소!"
한낮 별처럼 보기 힘든 아버지가 오시자 우리는 부산을 떨었다. 동네 사진관으로 몰려가 가족사진을 찍었다. 어떤 시간이 지나면 그걸 남겨두기 좋아하는 어머니가 고집을 부렸다. 기억은 안나지만 울어서 눈이 부은 여동생은 새침하게, 또 영문 모르는 어린 눈을 뜨고 두 주먹을 꼭 쥔 채로. 남동생은 전번 설에 산 색깔 선명한 스웨터를 입고. 나는 나란히 앉은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 서서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