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멸찬 스피커 음. 진작 훈련된 우리가 마킹펜을 놓자 답안지를 거둬간다. 그렇게 끝난 시험 첫 시간. 하나둘 일어난 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 바깥에서 고대하던 가족이 들고 나간 시험지를 받아 가채점할 것이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도 큰일이라고, 돌아온 아이들이 저마다 가족이 건넨 음료나 과자를 받아왔나 보다. '후루룩'거리고 '쩝쩝'대는 소리가 거슬린다. 고개를 숙여 딱딱한 책상에 이마를 댄다. 끓어오르는 마음이라도 가라앉혀야지. 이른 아침에 학교 앞까지 택시로 데려다 준 아버지는 내 등을 툭툭 쳤다.
"시험을 친다는 건 비로소 삶이 한단계 위로 올라간다는 거니 부담없이 치르고 오너라."
얘기 끝에 헛기침 한번 뱉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기온이 뚝 떨어져 있다. 둘째 시간 시험을 치르고 나자 염려스럽다. 아침 상을 치우고는 단장하고 쫓아왔겠지. 한데서 서성이는 어머니는 얼마나 걱정될까. 바깥 소음을 들으며 일어섰다. 그래, 날뛰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도 이기심이야. 아이들에 섞여 복도로 나섰다. 교실 밖으로 나선 순간 싸아한 공기에 코가 맵다.
다시 셋째 번 시간을 건너뛰고 나가자 어머니 표정이 밝다. 시험을 치르는 중 바깥에서는 즉각 정답지를 팔았다. 그렇게 재빠르게 답안지를 만들어 요긴한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운동장 주변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야야, 니가 안나와 걱정했잖아. 시험지를 대조해 봤는데 첫째시간하고 둘째시간 답이 하나도 안틀렸데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저런 어머니 표정은 처음이다.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주섬주섬 늘어놓고 건네주는 음식을 입에 넣는다. 어디서 사 왔을까. 따뜻한 국물도 곁들여져 그나마 맨살에 소름 돋게 만드는 한기를 견딜 수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석조 대리적으로 지어져 웅장한 테라스가 돋보이는 도서관 건물과 짜임새 있는 교정. 열 세운 히말라야시다와 그 사이에 자리한 아담한 연못, 그리고 분수대와 격조 있는 교정이 무척 마음에 드는 표정이다. 사방에 진을 친 아이들과 부모님이 비로소 보인다.
표내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 아마 어머니가 자랑을 곁들였을 게다. 그보다 큰일이 생겼다. 등교가 만만찮다.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없다. 사는 동네에서 시내로 갔다가 학교가 있는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를 다시 갈아타기에는 차비도 문제려니와 시간이 더 걸렸다. 별수없이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시오리가 넘는 거리를 마라톤하듯 다닐 수밖에 없다. 큰길을 쫓아가다가는 골목을 이리저리 지나쳐 방천길로 찾아나서면 학교가 제법 모여 있는 동네를 향해 등교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다리도 두어 개 건너고 긴 공장 담벼락을 지나고서도 한참 더 가야 보이는 학교. 길은 단순하지 않다. 어떤 때는 이쪽 길이 나을까 싶어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이 나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첫째 번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윤철이와 같이 가기도 하다가 한 동네 복순이를 만나 낯을 붉히기도 한다. 평소에는 아는 체라도 할 복순이가 앞만 보고 걷는다. 윤철이가 슬쩍 복순이에게로 내 어깨를 디밀었다. 나를 놀리는 장난이다. 살던 동네를 벗어나 몇 개의 다른 동네를 지나면서 이도 새로운 세상이라고 여겼다. 각기 다른 사람이 사는 곳.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을거다. 적응해야지. 아침에 눈 뜨면 긴장된다. 어정거릴 수 없어 눈뜨면 후다닥거린다. 하나뿐인 화장실도 차례를 지켜야 하고. 우물가에서도 내 일에 집중해야 했다. 밥도 삼키지 않고 먹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면 투지부터 끓어올렸다. 사십분 이상 걸리던 거리가 학년이 올라가며 이십오분까지 단축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숨도 참으며 걷고 또 걸었다.
겨울은 우리 앞에 놓인 긴 골짜기였다. 피할 수 없이 지나야 하는 난관. 겨울 앞에서 어머니와 윤미네, 상희네가 모여 김장을 했다. 똑같이 한 다음 화단에 나란히 묻은 김치를 꺼내 먹을 때마다 우리 김치가 더 맛있다는 윤미 엄마. 어머니가 선심 쓰듯 '그럼, 우리 김치를 먹어도 좋다.'고 했다.
"요즘 마이 힘들제?"
윤미 엄마가 우리 김치를 사발에 포기로 담아가다 말고 내게 눈을 찡긋한다. 당연스럽게 인사를 건네지만 새삼스런 관심에 당황스럽다.
"오빠오빠야! 쩌어기 달 좀 봐바."
"그래, 오늘 무척 밝네."
"근데 달 한쪽 꺼먼 게 뭐꼬?"
"그거? 곰이잖아, 달곰."
"으응? 달곰! 달곰은 참 심심하겠따."
남희는 웃음이 많다. 눈꼬리가 조금씩 감기면서 올라간 다음 꾀꼬리처럼 소리내며 웃는 웃음. 이는 제 어머니를 그대로 빼박은 듯하다. 아이들을 맡기고 남희 엄마는 저녁답부터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어둑할 때까지 친구들과 농구까지 하고 온 나는 하품을 몇 번이나 했다. 남희는 대청마루 끝 내 옆에 앉아 쫑알거리는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남희보다 두어 살 어린 남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벙어리인가 싶어 의사에게 보였더니 이는 아니라고 했다. 소리를 못내는 것도 아닌데 이를 말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걱정거리는 그외에도 있다. 다리가 바깥쪽으로 휘어져 걸음걸이도 시원찮다. 늘 콧물을 달고 사는데 누군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새침하고 도시적인 윤미 엄마보다 모난 곳 없는 생김새에 약간 후덕한 얼굴인 남희 엄마를 더 좋아했다. 그런 남희 엄마가 말이 없어졌다. 아울러 제대로 웃지 않았다. 사람을 보지 않고 먼 곳을 헤매는 눈. 남희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남희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시도때도 없이 낮잠을 잤다. 어머니 말이라도 전하려고 들여다 보면 아이들은 웃목에서 난장판을 저지르고, 이불을 푹 덮고 잠에 빠진 남희 엄마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 내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는 남희 엄마 옆얼굴이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뽀송송했다. 하지만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게 아쉽기만 했다.
Mariam, Long Shadow 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