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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그리고

차도 건너편 키큰 나무들을 보았다 분주한 사람들 아우성이나 질주하는 차량에도 아랑곳 없이 봄 오면 싹 틔우고 꽃 피운 다음 열매 맺기에 열중하면서도 의연한 자태를 흩뜨리지 않는 나무 햇빛이 얹힌 나뭇잎들이 바람에 까분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소녀가 나무 아래서 멈추었다 안전모를 벗자 출렁이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덩치 큰 버스가 풍경을 가리는 바람에 까치발을 했다 오홋, 차도쪽으로 내밀었던 발을 거둬 들여야 했다 발 아래 보도블럭 틈을 터전 삼아 구가하는 생이라니 바람이 길바닥을 쓸었다 물도 자양분도 없는 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초등학교 때 짝이 되었던 영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은근히 순응하던 큰 눈망울 복도를 돌아나가다 말고 돌아보던 단발머리 그래, 네 이름은 '영이'야 주변 소..

不平則鳴 2022.12.13

세 월

담장 위 검은고양이 한 마리.... 허리를 공처럼 궁글리더니 입 벌려 햇살 한줌 베어 먹었다 담장 위에 박힌 깨진 병이라든지 사금파리 등은 아랑곳 없이 도도하고 우아하게, 또 귀하게 걷는다! 바스락대는 마른 담쟁이 부서지는 청량한 바람 가을이 숨어든 담장 너머로 검은고양이가 훌쩍 사라졌다 "이거 와 이렁교?" "뭔데 그러십니까?" 술손님 드문 주막집에서 뻗대기 두어 시간 그도 낯 익힌 세월이라고 꼬장꼬장 손때 묻은 휴대전화기를 갖고 와 알아 듣기 힘든 말을 줄줄 늘어놓는데 전화 앞자리가 018이다 "이걸 왜 아직 안바꾸시고?" "떠난 그 냥반 돌아올 제 연락할 번호라도 있어야지예!" 강경상고 나왔다는 김 부장 돈 세고 마지막은 '따닥'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긴다 "햐, 딱 맞네, 맞어!" 만사 기분대..

不平則鳴 2022.11.28

그대 꿈자리

무진장 가을 속 한량없다가도 친구들과 함께 왔다며 인사하는 아이 때문에 부산스러웠는데 깨어나서야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 나비 떼에 둘러싸여 떠나는 뒷모습이 그대, 마지막이었구나! 앞뒤 절벽에 끼인 듯 숨조차 못 쉰, 짓이겨진 살에 박힌 강철 같은 뼈다귀여! 밤 새 울어댄 귀뚜라미 소리인들 애닯지 않았을까 소슬바람에 흩날린 낙엽보다 못한 존재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며 밝게 웃었어도 사랑 한줌 담을 수 없는 그대들 어둠 속에서 꿈을 꺾었으니 그 길 어이 밟을 수 있으랴 비탈져 흘러내린 이태원 길, 다부룩한 잔디로 덮어 두어라 다가올 새 봄, 짓밟힌 꿈 한조각이라도 싹틀 수 있게 - 이태원 참사를 애도합니다! Giovanni Marradi, Shadows

햇빛마당 2022.11.07

구월 편지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늘 떠올리다가도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막막한 탓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아서 자칫 함께 흐를 뻔합니다. 구월이 막바지에 다달았습니다. 가을 시작이 가을 끝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만큼 짧게 여겨질 가을. 마음은 이미 겨울 속으로 들어가는지도. 어쩌면 편지도 더 이상 쓸 수 없을겁니다. 넋두리를 풀어놓을 공간을 'DAUM'에서 없애겠다네요. 오랜 시간 이어온 삶의 흔적을 깡그리 떨어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쉬운 말로 '이번 생은 글렀어.' 하며 다음 생을 각오하지만 그 또한 내가 원하는 생으로 다가들까요. 글러버린 생이 다시 글러버려지고 그렇게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공간 속에 흩어져버릴 삶의 기억처럼 아무것도 아닌 생에 어찌 그리 집착하고 있었을..

不平則鳴 2022.09.28

아직 길에서

아침 운동 중에 코 안이 맹맹하다. 묽은 이 기운이 뜻하는 게 뭘까. 금방 일어섰다. 고개를 쳐들었건만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열이 터지다니. 응급조치를 해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한며칠 과로한 기억도 없는데. 내 몸은 가라앉아 침잠한 사이에도 이리 물길을 내고 저기로 흐르며 나름 생기를 지우지 않은 모양이다. 코 안쪽에 핏딱지가 엉킨 채 며칠을 지난다. 이게 지워질 만하면 다시 피가 터지기를 서너 번. 포기하고 놔둬 버렸다. 남쪽으로 여행을 갔더니 COVID-19로 연기했던 축제가 몇년 만에 열렸다고 했다. 일행과 밤 늦은 소읍을 뒤지기를 한 시간. 간신히 잡은 숙소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밤을 지난다. 진작 술을 한잔 들이켰건만 뒤척이다 새벽녘 일어났다. 의도적으로 한쪽으로 누워 있었더니 막힌 피딱지 때..

不平則鳴 2022.09.13

꽃, 꽃 그리고 여름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반포. 사람 사는 곳과 엄연히 구분한 방음벽을 차지한 무성한 담쟁이. 수많은 잎을 끌고 벽을 넘는다. 지금은 초록이 성한 계절. 그 사이마다 주황색 여름나팔이 삐죽삐죽하다. "보기 좋아요. 저게 무슨 꽃이에요?" "능소화네." 꽃 이름을 듣는 아이 눈이 반짝인다.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가끔 속이 화끈하다. 심심하면 이는 불길을 끄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뜻대로이지 않을 적마다 세상 구석구석을 날아다니고 싶을 게다. 줄줄이 내려온 꽃이 하늘거린다. 사연이 있음직한 이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때 안동에서 '원이 엄마 편지'가 발굴되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 관에 아내가 써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도 발견되었다. 이 애틋하고 절절한 양반가 부부 이야..

不平則鳴 2022.08.31

배롱나무 꽃 피우다

연지곤지로 단장한 이모, 눈자위가 발갛다 어젯밤 소쩍새 울음 잦아들 때까지 흐릿한 호롱불 너머 소곤거리더라니 괜히 밉기 만한 이모부 될 이가 사모관대를 만지며 불콰한 목소리를 낸다 지가 호강시킨다고는 몬하지만 걱정일랑 않게 하겠심더 조막 만한 당나귀 타고 우쭐대며 세상을 얻은 듯 신 난 신랑 늙으신 어미애비 두고 떠나며 노심초사하는 신부는 꽃가마 안에서 옷고름만 꼭 쥐었다 떠들썩한 사람들을 헤치고 이미 동구 밖까지 나간 행렬 미운 심보로 올라선 배롱나무 위에서 발을 구르는데 간지럽다며 숨 넘어가는 나무마다 뜨거워진 속내 감추듯 붉디붉은 꽃구름 내려 매미소리 여릿한 한여름 오후를 밝혔다 Sergey Grischuk, Rain...Rain(А дождь всё льёт)

햇빛마당 2022.08.04

함박꽃 그늘에서

배낭을 챙긴다. 현관에 들어서던 아이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어디 가시려나 봐요." "이번에 무주에 다녀오마." "장마철이 시작되어 비가 온다는데 괜찮을까요?" "글쎄, 와도 좋고, 오지 않아도 좋지." 일행과 함께하는 숲길을 떠올렸다. 서성이며 에둘러 돌아가는 건 어떨까. 가는 길에 누구라도 불러내 볼까. 두어 군데 연락했더니 반색하는 바람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헌데 시간을 조정하기가 여의치 않다. 얼결에 잡은 약속이 버겁다. 온전히 계획한 여행만 해야 하는 것을. 이도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보고픈 이들이 많아진 탓인지도 몰라. 결국 출발 전날 곁가지로 잡은 약속들을 취소했다. 일정을 말살시키자 뾰로통한 표정들이 보인다. 그 댓가를 어떻게 치뤄야 할까. 뾰족한 목소리들..

不平則鳴 2022.07.29

거기서도 너는

"세 밤, 세 밤만 참으라카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세상 일은 없다. '세 밤'은 어느 때 '삼 주'가 넘기도 하고, '한달'이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잠들기 전이면 바깥 달을 확인한다. 얼른 세 밤이 지나 '내가 기다리는 그날'이 와야 할텐데. "세 밤이나예?" "사내가 진득하니 참아낼 줄도 알아야 한다카이." 달이 부풀어 밝음을 더해갈 때면 흡족함으로 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열셋쨋날 상현달이다. 유례 없는 가뭄이랬지.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일고 있다. 달이 일렁여 마음까지 흔들리는 저녁. 날이 밝자 역시 덥다. 어젯밤 바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범벅이다. 강렬한 볕에 저절로 얼굴을 찌푸리고 걸었다. '어라, 이것 봐라.' 자갈밭 사이에서 익숙한 자태를 찾아냈다. 십여 년 전..

不平則鳴 202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