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平則鳴

구월 편지

*garden 2022. 9. 28. 12:24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하고 싶은 얘기를 늘 떠올리다가도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막막한 탓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아서 자칫 함께 흐를 뻔합니다. 구월이 막바지에 다달았습니다. 가을 시작이 가을 끝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만큼 짧게 여겨질 가을. 마음은 이미 겨울 속으로 들어가는지도. 어쩌면 편지도 더 이상 쓸 수 없을겁니다. 넋두리를 풀어놓을 공간을 'DAUM'에서 없애겠다네요. 오랜 시간 이어온 삶의 흔적을 깡그리 떨어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쉬운 말로 '이번 생은 글렀어.' 하며 다음 생을 각오하지만 그 또한 내가 원하는 생으로 다가들까요. 글러버린 생이 다시 글러버려지고 그렇게 되풀이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공간 속에 흩어져버릴 삶의 기억처럼 아무것도 아닌 생에 어찌 그리 집착하고 있었을까요.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부당함을 호소한들 누가 놀라기나 할까요. 개인의 소중한 기억은 뻔뻔한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걸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걸까요.

일에도 집중할 수 없어 일어섰습니다. 바깥에 나오자 또다른 세상입니다. 간간이 부는 바람 따라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어느새 따가운 햇살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갈벚나뭇잎들도 눈에 띄구요. 물결처럼 흘러나가는 인파 속에 들어서기 두려워 주춤거리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눈길을 돌렸습니다. 세상에,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나아가던 걸음을 되돌려 오지 않았겠습니까. 오랜 시간 저편에 있던 기억을 불러옵니다. 주춤주춤 손길에 이끌려 달콤한 커피 냄새 배인 공간에 들어갔지요. 그래, 이 또한 지나갈거야, 생각을 거듭하는 중에도 얇은 입술과 단정한 이마를 가진 상대는 묻어둔 자기 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내 표정을 보며 살짝 도리질도 합니다. 지난 시간 속 내가 엄하고 무서웠다는 시늉이겠지요. 에혀, 내가 지나온 걸음은 백척간두에서 오직 서 있기 위한 몸부림에 그치지 않았나 싶은 후회가 가득합니다. 어쩌면 아집과 독선을 드러내며 늘 이를 갈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고 세상을 향한 원망을 시퍼런 칼날로 휘두른들 별 소용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교차로에서 하염없는 생각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요란한 굉음이 울립니다. 들이찬 차 사이를 비집고 쫓아와 내 옆에서 '부르릉'대는 오토바이. 무심코 눈길을 줍니다. 오토바이 헬멧 바깥으로 삐져나온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생경하네요. 그러다가는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이런이런, 훔쳐보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당황하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겠지요. 퍼머머리를 보니 젊겠지요. 하얀 이를 드러낸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합니다. 허 참, 나도 얼결에 왼손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습니다. 굳어있던 내 얼굴은 펴졌을까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뒷머리를 챙긴 오토바이 운전자가 새삼 정중한 인사를 합니다.
아아, 그 웃음과 인사에 이제껏 위태위태하던 내 걸음은 온전해졌습니다. 덕지덕지 엉켜붙은 죄 또한 말끔이 씻겨 내렸습니다. 구월 바람이 차창으로 스며듭니다. 저녁 햇살이 마악 떨어지기 전이어서 서쪽 하늘이 붉디붉은 놀로 뒤덮입니다. 그렇게 저 속으로 사라진다 한들 애닯은 생각일랑 조금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에 굳이 남긴 억지를 세상이 지운들 누가 뭐라겠습니까. 나를 욱죄던 포박에서 풀린 것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눈 감을 일만을 생각하렵니다.











Michael Hoppé,
Lincoln’s L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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