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반포. 사람 사는 곳과 엄연히 구분한 방음벽을 차지한 무성한 담쟁이. 수많은 잎을 끌고 벽을 넘는다. 지금은 초록이 성한 계절. 그 사이마다 주황색 여름나팔이 삐죽삐죽하다.
"보기 좋아요. 저게 무슨 꽃이에요?"
"능소화네."
꽃 이름을 듣는 아이 눈이 반짝인다.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가끔 속이 화끈하다. 심심하면 이는 불길을 끄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뜻대로이지 않을 적마다 세상 구석구석을 날아다니고 싶을 게다. 줄줄이 내려온 꽃이 하늘거린다. 사연이 있음직한 이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때 안동에서 '원이 엄마 편지'가 발굴되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 관에 아내가 써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도 발견되었다. 이 애틋하고 절절한 양반가 부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소설 '능소화'도 출간되었다. '한여름날 크고 붉은 능소화를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라는 대목에는 너도나도 가슴 찡한 여운을 어쩌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존재감을 알리는 꽃이라니.
나도 집을 나설 적마다 숙연하다. 삶을 뿌리치고 죽음으로 발을 들이미는 느낌을 받는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뿌연 빛이 도사린 거실을 두리번거린다. 미처 챙기지 못한 흔적이라도 있을까 싶어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한며칠 지나자 능소화 아래 노란색 원추리가 솟아 교감을 나눈다. 이맘때면 나팔 형상을 한 꽃이 많이 핀다. 분홍 메꽃, 누구나 좋아하는 나팔꽃, 싸리문간에 한움큼으로 주저앉은 분꽃. 시골 돌담 아래서 환하게 피어나던 꽃말이 '순결'과 '희생'이라는 나리속 화려한 백합도 마찬가지. 더위에 힘겨운 산을 오르다보면 금방 얼굴이 펴지게 만드는 말나리, 털중나리 들도 볼 수 있다. 모양이 닭벼슬을 닮은 듯 독특한 맨드라미에도 눈길이 간다. 피고지는 꽃처럼 돌고 도는 세상. 꽃은 청하지 않아도 필 줄 안다. 고운 자태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해질녘 각자 의자를 밀고 나온 동네 할머니들이 동구나무 아래 둘러 앉았다. 왁자지껄 떠들기도 하고, 소근소근 목청을 낮추기도 한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담화 끝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기도 한다. 한바탕 큰비가 지난 다음 빈자리가 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대꾸하는 얼굴에 주름 많은 할머니, 시큰둥하다
"갔쑤, 먼저 간 지 남편 찾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사는 이들처럼 때를 놓치지 않는 꽃들. 은근히 빛나는 봄꽃과 달리 여름 꽃은 제 소명을 잊지 않는다. 매미 소리 요란한 오후 배롱나무 꽃이 소담스레 피었다. 곧 자귀나무 꽃도 습기 내음 맡으며 수줍게 얼굴을 내밀겠지. 세상에서 제 할일 마치고 가기. 나는 잊혀지더라도 한때 환한 존재로 빛난 적 있다고 알리기. 다들 그렇게 살다 간다. 바람처럼, 어느 때 끝나버린 빗줄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