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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티티새가 날아가 버린 하늘 울음 사그라진 자리 선연한 피 한 방울에서 꽃 핀다 떠난 존재에 대한 연민과 남겨진 무료한 시간에 대한 서술 뼛가루처럼 부유하는 미세 영혼들로 숲길이 혼곤하다 오늘은 남한산성이다 한나절을 헤매다 오솔길을 타고 내린 주막 거리 이방인처럼 떠돌았다 몸을 비틀어 고치 속처럼 얽힌 노랫소리를 더듬는다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등꽃 꽃등 밝힌 저 곳에 가 에스프레소라도 한잔 청하면 괜찮아질까 '갈등(葛藤)'은 개인이나 집단 사이 처지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자를 살펴보면 '칡 葛'과 '등나무 藤'이다. 칡과 등나무 모두 대를 휘감고 올라가는 성질이 있는데, 여기서 칡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 방향으로 감아서 이 둘이 같은 나무를 타고..

不平則鳴 2022.06.03

향기나는 벚나무

- 바람이 부드러워졌어. 새 세상이 시작된 거야. 이제 우리가 나가야 할 때야. 자칫 늦으면 안돼. 저런, 넌 왜 얼굴이 그렇게 부었니? 쟤 좀 봐, 아직 잠이 덜깬듯 눈을 반쯤 감고 있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손 잡고 나가야 하는 것 알지? 다 함께 외쳐봐. 내일을 위해! 오늘 점심 메뉴는 새싹비빔밥이다. 아기 볼살을 스친 건가. 깨끔한 맛이 입 안에서 돌아다닌다. 혀를 굴리며 한입 씹었다. 머리 속을 울리는 풍미. 여린 맛을 음미하듯 눈이 게슴츠레하던 맞은편 동료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 이 집에 테라스도 있었네. 바깥 탁자에서 먹을 걸 그랬나 봐요." "여기도 괜찮아요. 사람들 얘기와 바깥 세상이 한데 어울리니." "그나저나 어느새 봄이 사방에 내려앉았을까! 저기 벚..

自然索引 2022.05.04

늘 좋을 수야 없지만

"난 이번에 이**이에게 표를 줄라네."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 "내는 꼴보기 싫어도 윤**이다." "어련할라구!" "헌데 너는 정하기는 했냐?" "나야 무당파니 이번에도 기권이다. 같잖은 놈들만 나와 설치니." "그래도 오늘 밤은 눈에 불 켜고 새야겄지."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설왕설래한다. 여기저기 앉은 술집 군상들마다 목청을 높인다. 나처럼 투표를 건너뛴 아이가 한밤중에 눈을 부비며 나와 묻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쎄, 박빙인가부다. 아빤 거기 집중할 수가 없다. 다른 데 신경 쓰고 있어서." 상관없이 탄성과 간구, 아쉬움, 맘 졸임 등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이들이 있어 이 밤 외롭지는 않다. 어치피 결과에 연연할 수 없는 그네들만의 놀이. 다시 모이면 친구들은 선거를 입에 올..

不平則鳴 2022.04.05

일상으로

겨울 산. 호젓한 산길, 냉랭한 세상에서 이틀째이다. 오늘은 해지기 전에 내려가야지. 군데군데 쌓인 눈과 얼음으로 비명을 지르는 바닥. 땀과 습기로 만신창이인 겉옷이 딱딱하다. 아이젠에 달라붙은 얼음 조각을 떼냈다. 발가락 감촉이 살아나게끔 앞발을 거칠게 내딛었다. 아마도 부어 엉망일거야. 두꺼운 장갑에도 아랑곳없이 곧은 손가락. 얼얼한 뺨을 감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통증이 일 정도이다. 파도소리 같은 바람길을 헤치며 굼뜬 동작으로 나아갔다. 죽으러 가는 길처럼 막막하기 만한 저 언덕만 넘어서자. 의미 없는 다짐이야. 생각이 봄날 이모가 갈던 밭두렁처럼 끝이 없다. 걷는 동안 지난 삶을 복귀하며 고비마다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는데. 그래도 삶이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꿋꿋하게 걸었다. 내려가면 무엇부..

不平則鳴 2022.03.11

사는 일

회사 건물 반지하에 자리잡은 항아리 수제비집. 늘 붐벼 줄을 서야 끼니를 채울 수 있다. 맛있는 건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지. 비스듬히 햇빛 드는 창가 자리에서 동료나 친구와 정담을 나누며 먹으면 즐겁다. "여기 수제비 맛이 삼청동 할머니 집에 뒤지질 않아요." 내 말에, 수제비를 한입 머금은 누구라도 수긍한다. 더러 밀가루 음식에 까다로운 이도 거부하지 않는 수제비. 추억이 담긴 음식이어서일까. 그걸 화양리 골목식당에서 찾아냈다. 간이 맞지 않아 갸우뚱했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제 맛을 찾아 끄덕이게 되었다. 오늘도 예외없는데. 혼밥이 대세인지라 여자와 남자 사이 탁자에 끼어앉았다. 내 옆 남자가 투박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임시선별진료소인가요, 웬 사람이 저렇게 많습니까?" "요즘 코로나 환자..

不平則鳴 2022.03.07

꽃 피고지는 사이에

당신이 보낸 장편 소식 꽃이 피었다고 했지 그대와 꽃과 은은한 향기 세상이 온통 밝겠어 이른 시각부터 추적이는 비 봄비 치고는 제법 억세네 젖은 꽃잎에 얹힌 서러움 이 또한 주어진 숙명 다시 꽃 피는 계절이야 꽃 보며 떠올려, 행복한 당신을 오늘 동네 꽃집에 들렀지 꽃들마다 자기 이야기를 하네 꽃 속에서 고개 든 꽃집주인 꽃 닮은 미소가 웬지 익숙해 어서 오세요. 누구에게 드릴 꽃인가요? 꽃에게서 시작되는 행복이라니 밝고 환한 꽃으로 소담스레 묶었지 흔적 없는 당신이어도 여태껏 선해 어제 일처럼 그리는 나를 알까 무덤가에 놓으면 그대 꽃 핀듯 웃을까 'Jazz Waltz'(Dmitrii Shostakovich), Shostakovich Jazz Suite No.2 'Waltz' / Through LAYE..

不平則鳴 2022.02.08

오, 새날이여!

바람소리가 어린 아이 울음으로 이어지던 밤. 보호막처럼 이불을 두르고 손을 모았다. 아무 일 없이 새 아침을 보게 해달라고. 예전 그 밤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걸음을 뗀다. 하얀 눈밭 위 길이 흩뜨러지지 않을까 싶어 가끔 뒤돌아보았다. 한나절을 넘게 걸었건만 끝없이 이어지는 길. 그 발자국이 어느 순간 삐뚤빼뚤하다는 사실이 서럽기도 하다. 한 그루터기에서 자라 산지사방으로 벋어간 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하늘을 향해 풍성하게 벋은 가지며 물을 찾아 전초병처럼 헤맨 뿌리와 길게 늘어뜨린 또 하나의 자각. 이 몸짓 모두가 삶을 위한 것이었던가. 조금씩 느껴지는 바람소리를 들으려고 귀 기울였다. 나뭇가지에 앉았던 눈이 후드득 떨어진다. 아직도 열리지 않은 내 새 아침은?

墨香萬里 2022.02.05

십이월

하모 지운 초록 생기에 동장군쯤이야 괜찮아 구릉 위 마른 풀 무리 대양을 활강한 흰수염고래 참은 날숨마냥 곧추 세운 몸으로 버텼는데 창검을 세우는 바닥 서릿발에 나야말로 끝없이 밀려오던 꿈을 겨우 떨쳤다 여기가 어딘가 낯선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처럼 서먹서먹했는데 진한 커피 향을 들이키고, Joni Mitchell 익숙한 톤으로 듣는 Both Sides Now에 조금씩 살아나는 말초신경 아껴 먹다가 남겨둔 막대사탕 같았는데 가는 눈발 속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이 생경하다 누추하기 만한 십이월을 그렇게 보냈구나!

不平則鳴 202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