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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월

그렇게 맞장 뜬다고 세월이 지워지기라도 할 줄 아느냐 새초롬한 연둣빛 산괴불주머니 연약한 꽃대를 세운 건 그대 손길이겠지 완강한 담벼락을 타고 흘러내린 줄장미를 활짝 피운 건 그대 입김이겠지 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화사한 햇살을 스치는 건 그대 흔적이겠지 이제 바람으로 떠돌아 속박없는 그대, 행여 가까이 오거든 지난 시름일랑 지우고 나른한 꿈이라도 다시 꿀 수 있게끔 보잘것없고 거친 육신이나마 주리니 쉬어 가소서! Georges Bizet, Je Crois Entendre Encore

不平則鳴 2021.05.24

Savina Yannatou, O Tahidromos Pethane

Savina Yannatou O Tahidromos Pethane(The Postman's Dead), Manos Hadjidakis(1925~1994) 젊은 우체부의 죽음 젊은 우편 배달부가 죽었어요. 그는 겨우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랑은 이제 배달될 수 없어요. 사랑은 심부름꾼을 잃었으니까. 팔에다 제 사랑의 많은 말을 가지고 매일 왔던 사람이 바로 그이니까요. 당신 정원에서 꺾은 사랑의 꽃을 양손에 들고 가져왔던 사람이 바로 그였지. 파란 하늘나라로 그가 떠나갔어요. 마침내 자유를 얻어 행복한 새처럼 그렇게. 영혼이 그를 떠났을 때, 어디에선가 밤꾀꼬리가 울었답니다. 예전에 제가 당신을 사랑했던 만큼, 지금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요. 그와 함께, 제가 ..

思索一音 2021.05.02

탱자나무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다. 귀양지 집 둘레를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돌리고 안에 가두는 방식이다. 실제로, 가시나무로 처마까지 둘러 햇빛을 가리니 백주대낮에도 어두컴컴해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 했다. 이를 익히 아는 이들이 그 속을 '산무덤'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 여섯째 아들이다. 형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공모하였다는 죄명으로 소수서원 옆 순흥부 내죽리에 '위리안치'되었다. 하지만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순흥 안씨 등과 연합하여 단종 복위를 위한 군사를 모으고 훈련을 시키던 중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금성대군은 물론, 수백 년을 순흥에서 집성촌을..

自然索引 2021.04.29

無 愛

천릿길을 한달음에 내달려 네 앞에 앉았다. 숨을 골랐지. 다방 불빛이 왜 이렇게 어둑할까. 조금 여유 있게 왔으면 좋았을걸.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게. 낯선 네 새옷이 생경해 눈을 깜박였어. 오랜만에 보는 우리이니 단장하고 나온 걸 당연하게 생각하기로 했지. 얘기 중에 우스개를 곁들이며, 끊어졌던 우리 시간이야 아무렇지 않게 봉합하려고 애썼지. 그럴 수도 있어. 하찮은 얘기를 여기쯤에서 걷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우리 얼마만일까. 비브라토로 소리 높여 웃으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고 했어. 헌데 말이야. 걸리는 게 있어. 글쎄, 내가 당연히 여겼던 것처럼 네 마음속에 오로지 나만 있으리라 했는데 말야. 왜 자꾸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거야.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을 반추하며 잠깐 ..

不平則鳴 2021.04.25

겨울 끝

"낼모래 저녁 식사 같이 해요." "그러지." 아이의 일방적인 제안에 두말없이 승낙했다. 다음에는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한편으로는 진작 약속한 일정에 별일이 없는가 점검했다. 내가 늙은 건가. 기다렸다는 듯 대뜸 답을 하다니. 그렇게 낼모레가 닥쳐 흥얼흥얼 콧노래를 담고 있는 내게 아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네요. 식사는 다음에 해요." 가타부타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섭섭하다. 이 저녁 약속을 위해 두어 개 미뤄버린 일정도 꺼림칙하고. "아무튼 맘에 안들어." "그런 것 보면 애들이 굉장히 이기적인 것 같아요." "일면 맺고 끓는 거야 확실하다만..... 종이 다른 건지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네." "이제 걔들 세상이니까 형님과 내가 이해를 해줘야지요." 어느새 공직을 마쳐 일..

不平則鳴 2021.03.09

이월은

이월은 팔삭둥이처럼 여겨집니다. 본의 아니게 하자 있다고 낙인 찍혀 여기저기서 놀림 받던 천덕꾸러기. 짧아서 한편으로 허무하게 여겨지는 달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듯 보이기도 하는 통로. 억지로 비켜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에 쫓기고 날이 여느 달과 달리 부족해도 채우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닐까요. 이월은 철없던 우리 아이가 서너 살 적 심심하면 입에 달고 있던 원색 오살난 뿡뿡이 나발이었다가 이빠진 소쿠리에 덧대기 위해 부엌 한쪽에서 이모가 칼로 박음새를 해 들이밀던 쪼개진 대나무이기도 합니다. 불현듯 맞닥뜨렸다가 사그라드는 이월...... 우선 그대에게 안부부터 전합니다. 이런저런 일을 얘기해 줘야지 하고 다듬다가도 해를 넘기고, 달을 지나치며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더듬거리다가 푸념처럼 머..

不平則鳴 2021.02.25

라르고로

거슬리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영혼을 편안하게 만드는 소리도 있다. 한 며칠 세상이 빙하시대에 든 듯 추웠다. 그게 어느새 풀려 한낮 햇살이 따끈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우중충한 교실에서 아이들이 다들 쫓아나왔다. 工자 모양으로 이어진 본관과 별관에서 뚝 떨어진 음악실이 있다. 하얀 페인트 칠이 눈길을 끄는 이층 건물. 다음이 음악시간이어서 부담이 없다. 때가 되면 방음 잘된 이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이런 볕도 오랜만이지. 냉기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는 벽에 너도나도 성냥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었다. 나중에 나타나 슬금슬금 끼어드는 아이들이 있어 은연중 좌우로 힘이 뻗힌다. "야, 밀지마레이!" "니도, 햇볕 좀 가리지 말고 저리 비키라" "헛, 니가 소크라테스가?" 개중에 한둘이 언성을 높이다가 장난질 깃..

發憤抒情 2021.01.30

겨울 이야기

장롱 가장 아랫칸에 있는 요와 이불을 꺼냈다.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수였다. 빨갛고 커다란 꽃무늬가 중첩되어 있는데, 금색 실이 가장자리마다 보기 좋게 수놓여져 있는 화려한 금침. 이제 아무래도 괜찮아. 한숨 자고나면 거뜬할거야. 아랫목 온기가 달아나지 않게 요를 여미고 이불을 폈다. 이불 위에서 방방 뛰는 아이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꽃 위에 나비처럼 앉았다가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이 아득한 곳에 있는 듯 여겨졌다. "남희야, 동생 델꼬 이리 온나카이" 기진한 제 어미 목소리일랑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간신히 아이들 팔을 하나씩 잡아 이불 안에 구겨넣지만 이내 쫓아나가는 귀신들. 무겁고 답답한 게 싫을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남희 엄마는 묵직한 이불을 굴레삼아 눈을 감았다. 가슴이 눌려 이..

發憤抒情 2020.12.28

달곰 시간

야멸찬 스피커 음. 진작 훈련된 우리가 마킹펜을 놓자 답안지를 거둬간다. 그렇게 끝난 시험 첫 시간. 하나둘 일어난 아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 바깥에서 고대하던 가족이 들고 나간 시험지를 받아 가채점할 것이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이도 큰일이라고, 돌아온 아이들이 저마다 가족이 건넨 음료나 과자를 받아왔나 보다. '후루룩'거리고 '쩝쩝'대는 소리가 거슬린다. 고개를 숙여 딱딱한 책상에 이마를 댄다. 끓어오르는 마음이라도 가라앉혀야지. 이른 아침에 학교 앞까지 택시로 데려다 준 아버지는 내 등을 툭툭 쳤다. "시험을 친다는 건 비로소 삶이 한단계 위로 올라간다는 거니 부담없이 치르고 오너라." 얘기 끝에 헛기침 한번 뱉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기온이 뚝 떨어져 있다. 둘..

發憤抒情 2020.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