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낼모래 저녁 식사 같이 해요."
"그러지."
아이의 일방적인 제안에 두말없이 승낙했다. 다음에는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한편으로는 진작 약속한 일정에 별일이 없는가 점검했다. 내가 늙은 건가. 기다렸다는 듯 대뜸 답을 하다니.
그렇게 낼모레가 닥쳐 흥얼흥얼 콧노래를 담고 있는 내게 아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겼네요. 식사는 다음에 해요."
가타부타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섭섭하다. 이 저녁 약속을 위해 두어 개 미뤄버린 일정도 꺼림칙하고.
"아무튼 맘에 안들어."
"그런 것 보면 애들이 굉장히 이기적인 것 같아요."
"일면 맺고 끓는 거야 확실하다만..... 종이 다른 건지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없네."
"이제 걔들 세상이니까 형님과 내가 이해를 해줘야지요."
어느새 공직을 마쳐 일년간 휴직 적응기를 명받았다는 착한 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별 생각 없이 틀어둔 티브이에서 기상캐스터가 내일 날씨를 말하고 있다.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건강에 유의하라는 둥 건조주의보가 발령중이니 산불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헌데 동생이 나를 본다.
"헌데 형님, 저건 나도 맘에 안들어."
기상도를 비추던 카메라가 기상캐스터를 훑는다. 늘씬한 비율의 남자 기상캐스터의 잘 생긴 전신이 비춰지는데 유난히 짧은 바짓단을 가리키는 동생.
"저렇게 바짓단을 짧게 하면 기럭지가 길어보여서 좋다는데."
"저번에 애하고 각각 양복 하나 맞추러 갔는데, 굳이 바짓단을 짧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니 나원 참,"
동생이 혀를 찬다. 마찬가지라고 호응해 주려다가는 토를 단다.
"너와 난 아직 목 긴 양말만 신잖아. 애들은 그거 안신어."
"그래, 이상하게 답답하다잖아요. 기껏 양말로도 세대가 갈리는 걸 보면 참 희안해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데도 그런 걸 차이로 받아들이면 더 문제이지 않을까. 이미 많은 아이가 목없는 양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만. 그렇게 대세라는 게 만들어지고 거기 좇아간다면 누가 뭐라 할 수 없는거지."
저번 집안 예식에 참석하던 생각이 난다. 코로나 등으로 정지된 것처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정지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와중에도 부쩍 자라 가정을 이루어야 할 만큼 큰 아이들. 당연히 함께 가는 아이 차림이 이상하다. 양복에 운동화 차림이라니. 그걸 지적해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바지는 쫄바지처럼 달라붙고 N사의 신상인 운동화는 두툼해서 한참 전 대하던 미키마우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보이는데.
"구두가 없냐?"
"운동화가 편해서요."
그러던 아이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운동화를 새로 사야겠어요?"
"지금 신은 운동화도 같이 가서 샀잖아. 그게 자동차 타이어 네 개 만큼인 가격이었던 것 같은데!"
"신다 보니 발목 부분이 자꾸 쏠려서요."
"그럼 목 기~인 양말을 신던지, 운동화를 수선점에 갖고 가서 고치든지 해야지, 무조건 새로 사겠다는 게 말이 되냐?"
식사 후 동생이 약을 한아름 주섬주섬 꺼내서는 삼킨다. 어릴 때부터 약했다. 옆에서 뻔히 보는 내눈을 의식하고는 미안한 듯 웃는다.
"야 임마, 형 몰래 맛있는 건 혼자 다 먹나 부네."
어떤 약 조합인지 알 수 없다. 얼마 전 발명전을 얼핏 보니, 어르신네들마다 들고 다니며 한움큼씩 들어야 하는 약들을, 심장약은 심장 모양으로, 간에 관계되는 약은 간 모양으로, 혈액에 따른 약은 그에 따라 모양을 달리 만든 아이디어로 눈을 끈 것도 봤다만.
추운 날씨에 왔다가는 동생을 배웅한 다음 적당한 골프 바지를 권하는 이가 있어 두 개를 주문했다. 정확한 칫수야 모르지만 배달되면 바로 입게 할 참으로 수선까지 맡겼다. 헌데 양모를 속에 넣은 겹바지가 두툼해서인지 수선 후에 받은 바짓단이 무척 짧다. 명품 수선을 많이 한다며 자기 자랑하던 이 아줌마가 웬일이지. 단이 왜 이리 짧냐고 문책하자 우물쭈물하는 수선소 아주머니. 이미 가위질을 해버렸으니 기장을 어쩌고 말고 할 계제가 되지 않는다.
다행히 바지를 받은 동생은 용하게도 바지가 몸에 잘 맞다고 치하를 한다.
"그래, 이번 겨울이야 다 갔다만 다음 겨울에 잘 입으면 되지. 바짓단이 짧으면 흰색 양말 등으로 간지를 내면 된다네."
어떻거나 제 형 말에 환하게 웃는 동생 얼굴이 보여 좋기는 하다만.
하루는 긴데 한달은 짧다. 고속도로를 타려고 한남대교를 넘어가는데 눈부신 꽃이 마중한다. 곰팡이 같은 맛과 향을 지닌 보이차를 마신 것처럼 여겨지는 겨울이 지났다. 찬란한 봄을 내보이려 진작 꽃 피운 매화인가, 아니면 새로운 기류인가.
Pavel Ruzhitsky,
Serenade In The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