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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후에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신경을 긁는 날카롭고 긴 소리 다음에 이어지는 적막감. 어느 집에선가 개가 요란스레 짖었다. 짙게 들이찬 어둠이 들썩이도록. 어제는 끝났으며 오늘은 네 시간 뒤에야 시작될 것이다. 모든 게 정지된 시각. 아랫목에 기대앉은 채 꾸벅꾸벅 졸던 어머니가 가위에 눌린 듯 놀라며 일어섰다. 부엌으로 내려가 연탄불을 확인한 다음 다시 들어왔다. "에효, 벌써 하루가 지난거야!" 열린 아궁이만큼 입을 벌리며 두 팔을 맞잡아 몸을 뒤틀며 기지개를 켰다. 순간 귀를 기울였다. 골목 바깥쪽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고개를 저었다. 저건 아냐. 무게감이 떨어지고 어딘가 가벼워. 차 한잔 끓일 시간이 지났을까. 드문드문한 구둣발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이번에는 틀림없어. 통금 사이렌이 ..

發憤抒情 2020.11.03

남희네

우리가 학교에 가기도 전인 시각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작게 말하는 법이 없다. 너도나도 소리를 질렀다. "이걸 왜 여기에 쌓아뒀나? 그리고 개수가 모지라는 거 같은데." "......" "어이 조씨, 사람들 좀 불러요." "다 오라고 합니까?" 작업복 차림인 사람들이 벌써 여기저기서 뚝딱댄다. 개중 한둘은 화단 구석을 파헤치다가 결국 담장도 허물었다. 십몇 년을 살아도 데면데면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자기네 마당을 가로지르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쯤되면 쫓아와 삿대질해도 모자랄 판인데, 미리 일러 놓았는지 눈길 주다가는 반응 없이 들어가 버린다. 평탄정지 작업부터 했다. 이튿날째에는 자재가 들어와 쌓였다. 집은 이미 난장이어서 온갖 사람이 드나들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바쁜 어른들 틈을 슬금..

發憤抒情 2020.10.23

푸르름의 끝

"느그 집이 저기네." "맞아. 동네서 가장 큰 나무 두 그루가 여기서도 보여." 심심할 적마다 올라가는 동네 건너편 동산. 아이들과 경쟁하듯 뛰어올랐다. 한켠에 모여서서 동네를 어림짐작한다. "우리 사는 데가 손바닥 만하네." 모여 사는 모습이 별것 아니다. 어찌보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곳. 그래도 올망졸망하게 늘어선 곳은 복잡다단하기 짝이 없다. 거미줄처럼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길. 바닷가 바위 위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지붕으로 이어진 세상. 이곳저곳으로 통하는 수많은 길. 아마 누군가는 바쁜 걸음으로 골목을 나서겠지. 골목 밖 가게에서 또 다른 이는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있겠지. 그 앞 약국 안에서 약사 아주머니는 하얀 얼굴에 안경을 고쳐 쓰며 지나는 사람들을 살필 거다. 짤랑대는 엿장수 가위..

發憤抒情 2020.10.15

꽃을 위한 노래

노랑 병아리들 오종종한 걸음을 보며 미소 짓는다. '세상이 신기해!' 언 땅이 풀려 촉촉하다. 구석구석마다 헤집고 다니는 병아리들. 혼자 움직이는 법이 없다. 싸릿문으로 향한 하나를 따라 우르르 쫓아가기도 하고, 돌담장 아래서 햇빛과 어울려 풀피리 같은 소리로 노래를 한다. 영혼을 품은 것 같은 여린 색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 그리고 사랑. 병아리 색 꽃이 피는 새 봄.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 황매화, 풍년화, 히어리 들이 약속한듯 깨어나 저마다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노랑 꽃에 이어 하얀 꽃마저 피어나면 봄은 절정이다. 성장한 여인처럼 뜨거운 여름, 화끈한 계절에 도도한 빨강 장미꽃. 꽃은 어디서나 자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색을 선택한다. 짙은 유혹의 빛깔을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 향기는 또 얼..

不平則鳴 2020.10.04

Harry Styles, Sign Of The Times

두 개 이상의 유행병이 동시 혹은 연이어 집단으로 나타나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사태를 악화하는 '신데믹(Syndemic) 위기'..... 산정에 오른 제각각의 사람들, 무슨 생각을 할까? 코로나 때문이라지만 어쩌면 우리는 애초부터 혼자 생활하고 머물러야 하는지도 모른다 Harry Styles, Sign Of The Times Just stop your crying It's a sign of the times Welcome to the final show Hope you're wearing your best clothes You can't bribe the door On your way to the sky You look pretty good down here But you ain't really..

思索一音 2020.09.29

울음에 대하여

참으라고 한다 아니, 참으려고 한다 차오른 슬픔이 강이 되고 바다로 가는 동안 막걸리만 꿀꺽꿀꺽 들이키는 친구 정작 막걸리가 되는 밥은 먹지 않으면서 안주 위에 어둠이 놓일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탁자와 어둠과 동화한 한 사발 술에 개미와 하루살이가 달려들고 밤코양이가 다가와 입맛을 다셨다 슬픔을 참지 못한 친구가 누웠다 평상 위에 기일게 끈적끈적한 더위가 슬픔을 녹이고 눈물을 흘린다 일백 년도 더된 병귤나무 수피에 재운 헛집은 울음 표상이다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은 일만팔천 킬로미터 밖 허공을 떠돈다 우리 모두 울지 못하는 영혼이다 술잔과 바다가 따로국밥으로 놀아 견디지 못하는 밤 삭힌 울음이 새벽이 되도록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소우소로우, 해를 사랑한 별의 이야기

不平則鳴 2020.09.10

나를 견디게 하는 것

트롯 경연대회에서 '막걸리 한잔'을 맛깔나게 부른 가수 '영탁'. 그걸 계기로 '영탁'이란 막걸리도 나왔다. 노래와 쾌남 이미지가 잘 결부된 탓이다. 모임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 막걸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나를 위해 으레껏 '막걸리'를 시켜둔다. 다들 소주나 맥주를 마셔도 홀로 막걸리를 고집하고, 기본 한 병은 마시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막걸리를 따뤄놓고 책을 읽거나 바둑을 두거나 사진을 정리하기도 하는데, 나말고도 달려드는 게 있다. 바로 초파리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성가시다. 손을 휘젓거나 두 손을 마주쳐 애써 잡아도 주의를 흩뜨리는 초파리. 이게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잊을 만하면 눈앞을 오가는 통에 결국 일어섰다. 집 안을 들쑤셔 초파..

不平則鳴 202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