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저녁 아늑한 볕이 내린다. 누워 딩굴며 마른 풀의 까칠한 감촉을 즐기거나 낯을 간지럽히는 노란 햇살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진작 서둘러 삭정이로나마 망태를 채웠다. 마침 산등성이에 상태가 보인다. 저만큼 아랫마을 재중이도 나타나고. 솟아나듯 삼수와 경만이 등 아이들이 모여들어 .. 發憤抒情 2013.10.29
봄 밤 치마저고리 두어 벌을 하룻밤낮 동안에 만들어야 한다며 한숨 쉬는 어머니. 부지런한 손을 따라 혼잣말을 줄줄 뇌까린다. '옷을 부탁하려면 진작 해야지. 말만 꺼내 놓고서는 지가 시간 다 잡아묵고 인자서야 닥달하믄, 여편네 하고서는.' 그 여편네는 나도 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점.. 發憤抒情 2013.04.02
밤은 등잔불에 비친 그림자는 움직임에 따라 흙벽에 길게 드러눕기도 하고, 거미처럼 거꾸로 매달려 천장 서까래를 거뜬히 넘나들기도 했다. 그게 재미있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다니며 몸을 뒤틀다가는 결국 혼난다. '야들아, 정신 없따. 지발 좀 가만히 있거래이.' 힐머니는 무명이불 홑청을 .. 發憤抒情 2012.07.12
저녁소리 홀어머니 슬하인 동하. 원천적으로 우울함이 배어 있는 듯한 표정은 타고 나는 건지, 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오죽하면 억센 편이어서 동네에서 아무도 못당하는 제 어미가 자식 하나 못꺾어 쩔쩔 맬까. 옆에서 누가 뭐라든 일언반구 대꾸 없는 바윗돌이어서 애먼소리만 내다가 마니... 發憤抒情 2010.04.20
원조 가위손 거울에 빤히 비치는 이발소 안 풍경. 대기의자에 줄줄이 앉은 아이들은 좀이 쑤신다. 입이 찢어지게 연신 하품을 하거나 코를 파내거나 껌을 씹거나 졸고 있는 녀석들 생각은 오직 하나, 어서 순번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고개를 디미는 영복이 엄마, 북적이는 안을 .. 發憤抒情 2009.10.22
시냇가에서 거론하나마나 일 중독이 분명한 아버지는 오란비에도 불구하고 정시에 집을 나선다. 당신이 지면에 이는 뽀얀 물보라에 잠길 때까지 지켜보며, 어머니는 대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입을 쑥 빼물고. 우울한 비가 쉴새없이 내리고 내려서 마음에 습기를 재운다. 눅눅한 이불이라든지 .. 發憤抒情 2009.07.16
옛날옛적에 말간 햇살이 낭창거리는 들녘. 비바람에 시달려 신산한 문설주 거친 면에 기대 선 이모, 아까부터 눈길이 저만큼 앞을 훑는다. 슬금슬금 들이찬 봄을 찾는 걸까. 아니면 분주해질 기미를 떠올리는 건지. 시간을 내야겄네. 밭둑 마른 콩나무 줄기를 말끔히 걷어야지. 올해에는 동부콩도 좀 .. 發憤抒情 2009.03.12
감자처럼 딩굴고 싶어 purple & orange by Kessler Daniel Patrick 막내외삼촌이 결혼한다. 새벽 이른 때부터 온동네 아낙이 다 모인다. 참새 떼처럼 재잘대고 시끌거린다. "이 집 허우대 좋은 신랑은 어디 있대?" "아, 자네가 그걸 왜 물어? 지금 남의 신랑될 사람 찾아서 뭐해!" 깔깔거리며 앞말을 자른다. 들어서던 아낙이 .. 發憤抒情 2004.05.17
황톳길에 갇힌 날 재래시장을 지나는데 들리는 구수한 노래. 낡은 수레가 고여져 있고, 알록달록한 추억의 사탕을 팔고 있다. 달콤쌉싸름한 버터사탕 냄새가 번진다.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눈을 감자 깊은 곳에 재워 둔 낡은 시간들이 새나왔다. 비릿한 삘기맛과 솔 냄새가 불현듯 눈물나게 기억된.. 發憤抒情 200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