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憤抒情

여름, 열린 문

*garden 2019. 7. 2. 02:30













우중중한 거리. 낡은 단층가옥들이 저마다 어긋난 풍경. 담벼락에 늘어진 줄장미 꽃잎들이 부서지고 있다. 이 거리는 당최 맘에 들지 않아. 신주머니를 홰홰 돌렸다. 학교 가는 길. 시각이 이른가. 인적이 뜸해 고요하다. 삼거리에서 주춤했다. 평상시처럼 다니던 길로 갈까, 아님 질러 만화방 있는 쪽으로 갈까. 새로 나온 만화가 있을까. 뒤에서 성큼 다가온 인영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바람이 부서진 장미 꽃잎들을 들쑤셨을까. 숨을 들이켰다. 이어지는 낭랑한 음성.
"벌써 학교 가나?"
"웅, 누나!"
집안이 오가는 사이여서 더러 다녀가는 이웃동네 홍주 누나. 헌데 왜 이렇게 환해. 어깨 너머 아침 햇살이 기웃대 눈을 깜박인다.
"야가?"
난데없이 뒷머리를 '툭!' 친다.
"뭔 생각 하노?"
대꾸할 여지도 없이 어른 안부도 챙긴다.
"어무이하고 아부진 잘 기시지?"
"아, 예예!"
자정 넘어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구시렁대던 소란을 잠결에 지웠다.
"바뿌다, 마. 퍼뜩 가자."
이런, 여유롭던 아침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나는 신작로 정류소에서 합승을 타고 시내로 간다고 했다.
어느새 나뭇잎이 무성하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쫓아나온다. 길을 가다말고 단정한 원피스 차림의 누나가 몸을 기울인다. 핸드백을 뒤적이더니 드롭프스를 꺼내준다. 혼자 먹을 수 없지. 드롭프스를 해체해 하나를 되건네자 마지못한듯 입에 넣는다. 오물거리는 새빨간 입술을 올려다 보자 새삼 눈을 흘긴다. 싱싱한 여름을 빼온듯 닮은 말간 얼굴에 서린 옅은 미소. 아마도 이 계절은 홍주 누나를 위한 시간일거야. 푸르름이 누나에게 미처 스며들지 못해 주변을 떠도는 듯했다. 새침한 걸음걸이를 바삐 뒤따르는 내가 우쭐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눈길을 준다.

해가 점점 커졌다. 텁텁해진 한낮. 달아오른 땅거죽을 밟는 고무신이 말랑말랑했다. 아이들과 대규네 집이 있는 못으로 몰려갔다. 언덕배기를 두어 개 넘었더니 땀이 줄줄 흘렀다. 건너편이 아득했다. 물이 그득한 큰 못 어디서 놀아야 할까. 뙤약볕에 우리 키만큼 자란 풀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잠자리 무리가 신 났다. 숨다가 쫓아오르고, 저희들끼리 엉키다가 꼬리로 물 맛을 본다. 사방을 거침없이 횡행하는 날갯짓이 부럽다. 처음에는 발만 담글 요량이었는데, 참을 수 없다. 너도나도 발가벗고 뛰어들었다. 맑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다. 더위로 물이 미적지근하지만 이도 괜찮다. 서로에게 물을 끼얹거나 자맥질을 하며 깔깔거렸다. 아이들과 떨어진 자리에서 나도 어느 결에 몸에 물을 묻혔다. 주저앉아 목만 내놓았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펼쳐진다. 부력으로 차츰 떠올랐다. 조금씩 물장구를 치며 안쪽으로 나아간다. 잠자리처럼 팔을 벌렸다. 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잔잔한 수면이 평화롭다 싶은 순간 '아차!' 했다. 일어서려고 몸을 세운 순간 미끈하며 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물을 한움큼 들이켰다. 당황할수록 내 몸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들어갔다. 겨우 물 위에 떠올랐다 싶은 순간 멀어진 아이들이 보인다. 내게 손짓도 한다. 왜 이러지.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첨벙거렸을까.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물이 제 세상이고, 내 몸은 이물질이다. 물을 들이킬수록 아득하다. 거침없는 물이 나와 동화된다. 조만간 다른 세상에 나앉을거야. 캄캄할 따름인 곳. 이 못에 빠져 죽은이들이 많댔지. 더러 세간에 떠들던 뉴스가 떠올랐다. 이제 나도 죽는걸까. 순간 홍주 누나 얼굴이 보인다. 드롭프스를 입에 머금고 나를 보는 눈빛이 걱정스럽다.
'거기서 뭐하노? 빨리 나온나!'
한발을 휘젓지만 몸이 뒤집힌다. 그래, 나도 이곳이 싫어. 누나, 걱정하지마. 쫌만 기다려. 얼마나 내려왔을까. 그런데 바닥이 어디야. 기우뚱거리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왔다. 숨이 가쁘다. 들이킨 물이 코로입으로 벌컥벌컥 쏟아져나왔다.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하다. 다행히도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어렴풋하지만 저기가 이정표야.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다들 눈이 둥그렇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이다. 내가 장난친 줄 아는, 아이들이 심드렁하다.
몰려간 우리들을 대규 어머니가 맞았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해서 약해 보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해그늘에 표정이 명확치 않았지만 웃음이 환해 마음이 놓인다. 햇옥수수를 맛있게 쪄서 내놓았다. 너도나도 게걸들린 것처럼 훑어먹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먼 길을 돌아온 것처럼 기진맥진하다. 아이들 종알거림을 뒤로 하고 드러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곳에 있는 나는 누구일까. 살아있는 내가 현실일까. 등줄기에 흐른 땀을 어루만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사방이 환했다. 세상을 처음 보는 갓난 아이처럼 두리번거렸다.



















Apocalyptica,
Far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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