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억의 새로움 화단에 꼬물거리는 개미들을 본다. 열을 지어 나무를 오르내리거나 부산하게 흙을 헤집으며 옮겨다니는 모습이 난리통 피난민 행렬이 따로 없다. 큰비가 예보되어 있다. 끈적거리는 여름, 그나마 더위라도 지울까 싶어 사람들은 안도한다. 기상예보를 들었을 리야 없겠지만 감각적으로 .. 햇빛마당 2013.08.27
그런 시간 장마철 비를 핑게대고 일찍부터 나앉은 술자리. 몇 순배 돌아가자 알콜보다는 후덥지근함으로 정신 없다. 젠장, 이른 시각이라 에어컨도 켜놓지 않았잖아. 버티자니 등줄기가 후줄근하다. 참다 못해 한소리 꺼내려는 상대를 막았다. '이대로 있어봐. 아무려면 큰 탈이야 있을라구.' 의아.. 햇빛마당 2013.07.12
단절에 대하여 꽃이 한창일 때는 들뜬 채 빠져 있다가 이제 꽃 지고 신록이 부푸는 즈음에야 당신을 그립니다. 물론 짙은 초록 세상에서도 꽃은 쉼없이 피고 집니다. 다만 이전보다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이들과 언덕배기에 있는 정자에 올랐다가 까무룩 잦아든 적이 있습니.. 햇빛마당 2013.06.19
익숙한 침묵 '와 니가 여기 앉아 있노?' '선생님이 인자 요가 내 자리래.' 새 짝이 된 복순이. 일찍 등교해서는 내 옆자리에 앉아 시침뗀다. 눈을 깜박이면 긴 속눈썹이 인형 같다. 코 밑에 있는 복점과 하얀 살결이 어울려 배시시 웃으면 예쁘다. 조신하여 말도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우선 책.. 햇빛마당 2013.05.27
결혼이 구원인가 친인척이 모인 자리에서 으레 '결혼 언제 하냐?'는 질문을 받는 재정이. 그렇찮아도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편인데, 말이 더욱 빨라진다. '아으, 식구들한테만 오면 듣는 말이네.' 은행에 취업한 지 해가 넘어 제법 샐러리맨 티가 난다. 식구와 동떨어져 지낸 자취생활에 이력이 났고, 거기에 .. 햇빛마당 2013.04.19
봄날 공상 사랑은 맹목적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계절. 그렇다고 사랑이 나중 아무 데나 발 뻗고 주저앉는다고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사랑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이므로, 사랑은 길을 잃은 채로도 온전하게 자기를 지킬 줄 안다. 돌이켜보면 사랑은 지난 다음에도.. 햇빛마당 2013.03.25
진혼의 시간 발걸음을 늦춘다. 병원 복도를 지나는 동안 서두르며 높아진 숨을 가라앉혔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기, 차갑게 주시하며 거리 두기 등을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따르는 발자국 소리로도 알 수 있지만 돌아본다. 아이가 찔끔한다. 돗수 높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옹다문 게 녀석도 긴.. 햇빛마당 2013.03.19
다시 설 군밤과 오징어, 호빵과 국화빵, 찹쌀떡까지. 당신은 입에 대지도 않으시면서 안자고 기다릴 우리를 위해 손에 들려 있던, 겨울 저녁이면 떠오르는 소소한 군것질거리들. 여동생은 냉큼 아버지 품에 안기다가도 들척지근한 약주 냄새와 까칠한 턱수염에 질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햇빛마당 2013.02.08
장편서신 얘기야 누차 들었지만 정작 확인할 수 없었지요. 기온이 떨어져 추워졌다고, 눈이 내려 쌓였다는 사실만으로 겨울을 알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길을 떠납니다. 모름지기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겨울을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구요. 그건 알 수 없어요. 다만 마음 한자락을 커튼으.. 햇빛마당 2013.01.22
대병, 1983 여름 몇날 며칠 퍼부은 비로 무른 산이 주저앉는다. 빗물이 앉은뱅이 산을 훑어 패인 흙을 싣고 와당탕 흘렀다. 사방이 물길이다. 건너뛰다가 섬에 갇혀 둘러보면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잦아드는 비. 물기를 안아 묵직한 구름이 산을 거슬러 오른다. 어스름이 내리는 사이 용케 풀벌레 소리가 .. 햇빛마당 201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