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봄날에 집 안 어디엔가 그물을 쳐놓은 할머니. 거기 내가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이다. 나가기 전 치맛단을 쥐고는 나붓이 앉아 손주 옷차림을 여기저기 간섭한다. 오물거리는 입으로 어찌 그런 천둥소리를 내는지, 잔소리가 한 소쿠리는 된다. 말 끝에 다짐을 놓는다. 야야, 할매 말을 절때 흘려들으믄 안된데.. 햇빛마당 2011.05.25
겨울 전언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길면 반백 년 쯤이야 거뜬하여 백수를 누릴 것이고, 짧으면 지금 일어서서 저 문 앞을 나서다가 불현듯 죽을 수도 있다. 이는 내 삶을 내가 모르며 내 죽음을 내가 관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아, 딸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거실에 비스듬히 찾아 든 노.. 햇빛마당 2011.02.25
겨울 나그네 때가 되면 친구처럼 달라 붙는 불청객. 감기로 한 며칠 맹맹하더라니, 오늘에야 썩 괜찮다. 우선 후각이 예민해졌다. 코에서 정수리 쪽으로 통로가 난 듯 훤한 기분이다. 제과점을 지나며 매장을 정리하는 아주머니의 건강한 웃음을 보았다. 잘부르는 노래라도 흥얼거리는 걸까. 부풀어오르는 빵 냄새.. 햇빛마당 2011.01.26
노래 세상 동생네와 함께하는 자리. 소문난 고깃집이어서 북적인다. 굽고 씹으며 떠들썩한 가운데 술도 들이켰다. 기분이 고조된다. 분위기를 먼저 알아채는 아이들. 이구동성으로 소리친다. 우리 노래방에 가요. 어, 그래? 노래들을 하고픈 모양이구나. 썩 좋아할 수 없어도 내색 말아야지. 어둡고 쿰쿰한 냄새.. 햇빛마당 2010.12.03
나무 아래서 배웅하는 당신 모습을 안보려고 눈 질끈 감고 걷는다. 대신 어머니가 이고 있던 우람한 나무가 큰 걸음으로 뚜벅뚜벅 뒤따르는 걸 느꼈다. 돌아보지 않을려다가, 당신 손이 끊임없이 나부끼길래 슬쩍 눈을 떴다. 이 눈치 없는 눈물이라니. 바람이 세차지며 이파리란 이파리가 다 일어나 초록 실핏줄이 .. 햇빛마당 2010.11.05
그렇게 지나간다 마스크로 가려 눈만 내놓은 칫과의사. 표정이야 모호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팔뚝에 드러나는 힘줄이 보잘것 없어도 그만하면 충분하다. 물경 수십 말의 곡식을 바수고 수 톤의 고기를 거덜냈을 안쪽 장한 어금니를 폐가 흙벽돌 들어내듯 거침없이 꺼낸다. 아찔한 내 심정은 아랑곳없이. 주변을 긁고 .. 햇빛마당 2010.10.29
소슬바람 일던 저녁 놋쇠 밥그릇이 댕강거리도록 밥알 하나 남김없이 긁는다. 아쉬움 끝에 접는 만찬. 헛배나마 쓰다듬어야지. 거품 꺼지듯 열기가 가셔 의아한 저녁, 여느 날과 달리 평상에 일렁이는 바람. 딩굴대다가 '아!' 하며 소리 지를 뻔했다. 조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더니. 세숫대야로 갖다 퍼부은 듯 .. 햇빛마당 2010.09.07
막간에 베란다에 둔 화초들. 어째 잠자리에서 막 빠져나온 우리 꼬마처럼 부숭숭하다. 지난 봄, 고르지 못한 일기 탓인가. 안되겠다. 밑에 내려 땅힘이라도 받게 해야지. 부산을 떨며 몇 차례나 승강기로 오르내리락거린다. 화단 한쪽 눈에 잘띄는 곳에 모아 두고 오갈 데마다 눈길을 주었는데, .. 햇빛마당 2010.07.09
노래하는 숲 해껏 허룩하기는커녕 산만 높다. 아부지는 와 안오노? 너거들 자고도 한사리가 열두 번 왔다갔다 해야 할끼다. 밤은 어찌 그리 까만지. 까무룩 가라앉았다가 먼 산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전등이 깜박거렸다. 실눈을 뜨자 눈앞에서 아부지가 한 눈을 .. 햇빛마당 2010.07.02
[가족♥]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이 누운 자리가 비었다. 대신 한낮 열어 둔 창으로 든 노란 햇살이 반쯤 점령했다. 달려갈 적마다 눈을 꼬옥 감고 계시던 어머니. 대체 어떤 행복한 꿈이길래 그토록 쉬임없이 꾸어야 했을까. 더러 말간 미소를 기대하기도 한다. 허나 표정이야 평온하지만 결코 입가에 웃음.. 햇빛마당 2010.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