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낭비벽 심한 동물이라지 요즘엔 사냥감을 놓치는 일이 잦다. 대략 구천 번 이상의 사냥을 치르면서도 실패한 적이 극히 드물었는데 왜 이런가. 우선 쫓아가기가 힘들다. 애써 따라가도 힘에 부쳐 목표물을 포획하지 못한다. '신은 죽었다'던 니체는 인간정신의 발달을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의 3단계로 정의했다. .. 햇빛마당 2012.11.27
청색시대 해는 오후 나절 할머니에게 들른 방물장수처럼 서두른다. 해가 마을 입구를 빠져나간 다음 하늘은, 타이탄처럼 받든 동구나무를 불쏘시개로 붉게 타올랐다. 놀이 사그라져도 한참 동안 훤한 서녘과 달리 해가 지난 길을 따라 어두운 보랏빛 너울이 내리며 캄캄해진다. 그게 장엄해서 우.. 햇빛마당 2012.11.25
웃던 감자 하늘 아래 땅은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농사가 곧 천하의 일 가운데 으뜸이다. 사람이 흙과 더불어 살던 시절. 땅에서 나고 자란 농작물로 끼니를 잇는다는 건 귀한 일이어서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므로 다 모여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른 새벽에 쫓아나가 .. 햇빛마당 2012.06.27
여름 저녁답 돌담 아래서 용만 쓰던 나리. 어느 때 진하디 진한 붉은색 꽃을 툭 벙글어 놓았다.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쪼그려 앉은 이모가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앞치마 자락으로 눈가 물기를 찍어낸다. 하지만 이도 잠시, 부지런한 걸음으로 금방 아무렇지 않게 콧노래를 담고는 텃밭에 나가 저.. 햇빛마당 2012.06.05
출렁이는 나무 사람을 찾으러 산동네를 헤맸다. 비탈진 길을 오르내린 지 너댓 시간여. 산지사방으로 벋은 골목을 따라 뒤죽박죽인 집을 샅샅히 뒤졌건만 집 안에 집이 있고, 집 뒤로 엉뚱한 집이 주저앉아 달랑 쪽지에 적어 온 번지만 빠진 이처럼 증발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픈 발바닥하며, 장딴지도 .. 햇빛마당 2012.02.28
상심한 날들에 대하여 중학생이어도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짝 상훈이. 죽이 잘 맞는 편인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집을 부리면 티격태격한다. 어제 천규덕이 레슬링 하는 것 봤나? 우리 집에선 그딴 것 안봐. 유명 프로복서인 강세철이나 아들인 허버트강에서 이안사노와 김기수, 유재.. 햇빛마당 2011.10.25
시월함 가을 오후엔 한줌 햇살도 천금이니 쉬이 놀릴 수 없지. 저녁답까지 이어진 도리깨질로, 조마조마한 바지랑대에서 이 빠지고 눅진한 날개로 만사가 귀찮은 고추잠자리만 안절부절했다. 할매 어깻죽지나 허리께 봐라. 괴기 한근 쯤은 붙었다이. 등잔불 아래 무명저고리를 서너 개나 펼쳐두고는 찌부둥.. 햇빛마당 2011.10.11
길과 영원 속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e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g On such a winter's day 익숙한 가락에 맞춰 건들거리며 자리를 찾는다. 바람에 묻어오는 신명에 다들 우쭐하다. 야, 너도 왔구나! 그러는 너는, 못본 사이에 좀 여윈 것 같네. 손바닥을 마주치고 서로 .. 햇빛마당 2011.09.30
나의 숲에 드는 서러운 볕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때이다.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수혁이에게는 데모도 신성한 학습현장이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숨어 다녀야 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니, 함께 사는 어른은 늘 조마조마하다. 크면 자식도 놓아 주어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해서 만류한들 먹혀야지. 고래 심.. 햇빛마당 2011.09.27
어디서 와서는 갓난아기일 적 사진을 들추다 말고 아이가 웃었다. 제게 이런 때가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요. 사진이 말하잖니? 그때 네게서 얻는 위안이 어디 비길 데가 없더라만서도. 갓난아기이던 아이가 한밤에 깨어서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눈을 뜨면 매일을 하루같이 긴장하고, 숨이 목에 차도 쉴새없이 뛰.. 햇빛마당 201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