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어도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짝 상훈이. 죽이 잘 맞는 편인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집을 부리면 티격태격한다.
어제 천규덕이 레슬링 하는 것 봤나?
우리 집에선 그딴 것 안봐.
유명 프로복서인 강세철이나 아들인 허버트강에서 이안사노와 김기수, 유재두 등에 대해서 달달 읊어댄다. 프로레슬러인 역도산과 김일의 계보나 안토니오 이노키 등도 화제에서 빠뜨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 인기가 드높다. 거기에 얹어 레슬러나 복서 들의 경력이나 기술 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부분이다. 녀석은 신이 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한마디라도 거들기만 하면 면박을 해댄다. 문외한인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권투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매치라는 세기의 대결이 벌어진 날, 학교는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위성중계 방송이 시작되는 둘째 시간은 수업도 진행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갑론을박하며 교무실에서 웅성거리고 있었으니.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이름을 바꾼 무하마드 알리냐, 아니면 무패가도의 조 프레이저가 이길 건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섣불리 결과를 점칠 수 없다. 키큰 아이들은 교무실 창 너머로 기웃거리거나 아예 학교 옥상에 올라가 교무실 쪽을 훔쳐본다. 흑백 텔레비전 수상기에 어른거리는 중계를 보며, 무의식중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 좌우로 흔들며 새도우 모션을 취하는 아이도 있다. 사람들은 왜 떠벌이 알리를 좋아할까. 반사적으로 조 프레이저의 전적에 흠이 없기만을 바라며 은근히 응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졌다. 그것도 아웃복싱을 구사한 알리에 의해서. 기고만장한 상훈이가 '그것 봐라 ' 하는 투로 본다.
누군가 권투 글러브를 갖고 왔다. 점심을 먹은 다음 책상을 물려 공간을 냈다. 부추긴 아이들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상훈이와 내가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쏴 주지.
그것도 권투냐? 한 주먹에 부셔주마.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하모.
엉겁결에 낀 글러브는 의외로 부피감이 크다. 주먹을 내미는지 몸이 나아가는지 구분이 쉽지 않다. 상대를 때리는 순간 손목을 비틀면 맨살이 습자지처럼 찢어진다고 했는데 말야. 탐색전이고 스텝이고 있을 수 없다. 엉켜 주먹을 마구 휘두른다. 누가 어느 정도 맞고 때렸는지 분간되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린다. 아이들 응원에 다른 반 아이들까지 죄다 몰려들었다.
켄 노턴을 이긴 알리는 조 프레이저를 꺾었지만 조지 포먼에게 타이틀을 빼았겼다. 물론 나중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다시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알리를 꺾었다. 세월 속에서 견디는 건 없다. 환호성이 잦아들며 권투도 사양길에 들었다. 챔피언들은 더 이상 자기가 챔피언이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캥거루처럼 쫓아다니며 발길질을 해대는 이들을 만났다. 나도 질새라 잽을 구사하고 연신 스트레이트를 뻗거나 어퍼컷을 날렸다. 상대에 따라 해머링이든 바디슬램이든 가리지 않는다. 탑오브스피닝휠킥인들 날리지 못하랴. 그러다가 무참히 깨지고 난 다음에는 컴컴한 영화관에 들어 씨근덕대며 홀로 분을 삼킨다. 옆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별 이상한 놈이라는 듯 곁눈질하며 혀를 끌끌 찬다. 그레타 가르보라든지 사진이 잘 받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화면에서 활짝 웃었다. 더러는 캔디스 버겐의 서늘한 이마가 돋보이는 것을 위안으로 담아 둔다.
누구라도 좋아, 덤벼!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어지러운 걸음을 바로 세운다. 발에 힘을 줘야지. 바람 소리를 들었다. 동정이나 연민 따윈 생각지 않아. 콧잔등이 가려워 긁으려고 했지만 글러브를 낀 손이라 쉽지 않았다. 찡그린 상훈이 얼굴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낄낄거렸다. 상훈이도 따라 웃었다. 아이들이 소리를 마구 질렀다.
어느덧 가을. 마른 낙엽 딩구는 길 한가운데서 몸을 곧추세운 나. 이제 누구를 상대로 주먹을 휘둘러야 하나!
Giovanni Marradi,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