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아래서 용만 쓰던 나리. 어느 때 진하디 진한 붉은색 꽃을 툭 벙글어 놓았다.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쪼그려 앉은 이모가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앞치마 자락으로 눈가 물기를 찍어낸다. 하지만 이도 잠시, 부지런한 걸음으로 금방 아무렇지 않게 콧노래를 담고는 텃밭에 나가 저녁 찬거리로 풋고추를 한움큼 챙겼다. 고랑 옆에서 티도 내지 않고 꽃이 피고지는 사이에 주렁주렁 달리던 가지 꼭다리를 비틀어 따며 내게 눈을 찡긋 한다. '생가지도 맛있다.'며 이로 성퉁 끊어 먹는 이모. 그걸 멀뚱멀뚱 보노라면 이내 등짝이 남아나질 않았다.
'야가 생전 모르는 사람처럼 보네.
집집마다의 뒤란 굴뚝에서 뱉어낸 연기가 산밑을 맴돌다가 떠나지 못하고 종종댄다. 밥이 뜸드는 기미가 일면 슬쩍 가마솥 뚜껑을 열고 가지 열매를 밀어 넣던 투박한 이모 손. 나중 푹 쪄져 무른 가지는 잘게 찢어져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무쳐져 상에 올랐는데. 어른들 뿐 아니라 우리 젓가락도 쉴새없이 쫓아가서 금방 동이 났다.
밭고랑 한켠에 수줍게 서서 여느 여름처럼 두툼한 잎과 함께 꽃을 뽑아낸 가지나무. 보라색으로 오밀조밀한 가지 잎맥을 본다. 생을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인자는 고귀한 태생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지 않을까. 꽃을 보며 아득한 날의 저녁 밥상이 불현듯 그리워지는 건 어인 일인가.
Oliver Schroer,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