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땅은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농사가 곧 천하의 일 가운데 으뜸이다. 사람이 흙과 더불어 살던 시절. 땅에서 나고 자란 농작물로 끼니를 잇는다는 건 귀한 일이어서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므로 다 모여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른 새벽에 쫓아나가 논에 물대기, 쇠여물 끓이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몸을 놀린 머슴 방구가 마당을 가로질러 온다. 겸연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방구가 땀이 쏭쏭한 콧잔등을 훔치며 평상에 차린 상 한켠에 앉아서야, 이모는 매운 풋고추를 넣어 칼칼하게 끓인 된장 뚝배기를 상마다 올렸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고 된장국 간을 본다. 그제서야 떨거럭거리며 식구들이 수저를 든다. 부산한 가운데 우스운 일과를 꺼내 웃음꽃이 와글와글 피기도 했다. 아침 나절 선하게 기웃거리던 바람마저 잦아들자 자글거리는 햇볕. 오늘 하루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가끔 이모는 면경을 앞에 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러구러 한참, 현란하게 손짓을 거듭해도 고루 펴지지 않는 분가루. 햇볕에 그을은 탓인다. 속상해서 두 팔로 안은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뭉친 분가루만큼 짜부라져 한동안 끙끙 앓곤 했다. 그래도 뙤약볕 아래 비탈밭에서 하지분감자를 캐낼 적이면 이모 얼굴은 누구보다 싱싱해진다. 이걸로 어느 때든 식구들 허기야 거뜬히 달랠 수 있다. 동글동글한 감자들을 쥐어보며 웃었는데, 웃음이 데굴데굴 굴러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웃었다.
감자 싹은 용을 쓰느라 처음이 어려웠지. 삽시간에 잎이 무성해지고 꽃을 피워 분주하다. 꽃이라든지 아래 잔가지일랑 싸그리 잘라줘야 알이 튼실하댔는데 그게 쉽지 않다. 농사 아니어도 부지런해야지. 핑게로 점철된 지난 게으름을 혀를 차며 스스로 나무란다.
으레껏 여름 초입이면 감자를 너끈히 캐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짱 황이다. 가물어도 아주 가물다. 알을 여물게 갈무리하지 못하고 둔덕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는 감자뿌리가 눈에 거슬린다. 냉장고에 넣어 두거나 마대 자루에 담아 두어도, 베란다 구석에 굴려 놓아도 악착같이 싹을 틔우던 치열한 삶의 본능이 가물거린다. 어릴 적 이모를 떠올리며 분감자만 달라고 했더니 종묘상을 지키던 아주머니가 이내 입바른 소리를 해댄다. 쪄먹을 거면 모르지만 반찬이라든지에는 분감자가 적당하지 않다면서. 수긍하며 받아온 씨감자를 심었는데, 역시 농사는 하늘이 받쳐주어야 하는 게야. 과연 마령서(馬鈴薯)라는 탱글탱글한 감자 알을 보며 그때 이모처럼 동그란 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
Yanni, Playing B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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