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후엔 한줌 햇살도 천금이니 쉬이 놀릴 수 없지. 저녁답까지 이어진 도리깨질로, 조마조마한 바지랑대에서 이 빠지고 눅진한 날개로 만사가 귀찮은 고추잠자리만 안절부절했다.
할매 어깻죽지나 허리께 봐라. 괴기 한근 쯤은 붙었다이.
등잔불 아래 무명저고리를 서너 개나 펼쳐두고는 찌부둥한 몸을 뒤트는 할머니. 두터운 각질로 감각 무딘 손아귀로나마 적삼 아래 말랑한 젖살도 주물렀다가 딱딱해진 살점들을 움켜쥐어 뜯은들.
이게 누구 몸이꼬? 내사마 칵 죽으믄 편안해질랑가.
부엌에서 사랑채로, 안논에서 뒷산 묵정밭으로 쏘다녀도 거뜬하던 몸이 어두워지면 주체하기 어렵다. 디딜방아처럼 내려앉는 눈꺼풀을 부빈다.
원아, 이리 와봐라. 바늘에 실 좀 꿰도고.
콧등에 추킨 돋보기 너머를 주시한다. 침을 오지게 발라 서릿발처럼 끝을 세운 실침으로 겨냥한 바늘귀에 헛손질만 거듭하다가 포기했다. 혼자놀이에 익숙한 나는 그림자로 흙벽에 소를 만들었다. 귀가 긴 토끼나 개 머리도 새기다가, 방금 들어선 코끼리일랑 순식간에 쫓아버리고 납작 할머니 옆으로 가 앉을 때 가르랑대던 등잔불이 꺼졌다. 낯설지 않은 어둠, 다소곳하게 눈을 뜨자 점차 주변이 또렷해진다. 실밥을 문 채로 할머니가 귀 밑을 긁었다. 입이 찢어져라 따르는 하품을 뒤에 두고 봉창을 연다. 싸립문 가에 매둔 삽살개가 움뻑 일어나서는 몸을 뒤흔들며 앞발을 뻗었다. 목줄이 걸려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유난하다. 어느새 잎을 떨어뜨리고 감을 주렁주렁 늘어뜨린 감나무 가지가 돌담 위로 삐죽삐죽 솟았다. 가을 하늘을 밭친 달이 반이나 잠겼을 때 쇠기러기 떼가 창천을 날았다. 어제까지 키를 키우며 당당하던 나무들이 조금씩 울음소리를 냈다. 거미줄처럼 얽힌 논둑길을 먼 걸음으로 오시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바람같은 술 냄새가 끼친 듯해 울멍울멍한 눈길을 둘 데가 없다.
Frdric Franois Chopin, Andante Spianato
(Piano)Artur Rubinstein
'햇빛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렁이는 나무 (0) | 2012.02.28 |
---|---|
상심한 날들에 대하여 (0) | 2011.10.25 |
길과 영원 속 (0) | 2011.09.30 |
나의 숲에 드는 서러운 볕 (0) | 2011.09.27 |
어디서 와서는 (0) | 2011.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