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나의 숲에 드는 서러운 볕

*garden 2011. 9. 27. 09:58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때이다.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수혁이에게는 데모도 신성한 학습현장이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숨어 다녀야 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니, 함께 사는 어른은 늘 조마조마하다.
크면 자식도 놓아 주어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해서 만류한들 먹혀야지.
고래 심줄같은 저 고집을 다신 안볼 줄 알았는데, 대체 누가 꺾노?
정의감의 발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온전히 한 곳에 열정을 쏟고 싶은지도 모른다. 서너 달 정도 소식 감감하던 수혁이가 수염이 거뭇한 채 동네에 나타난 날, 기다리던 형사들에 의해 담빡 끌려간다. 애절한 어머니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엉덩이 위 바지 허릿춤을 잡아 들어올린 바람에 옴쭉달싹 못하는 모습이 더욱 측은하다.
허리띠 없이도 입을 수 있는 바지가 유행한 적도 있다. '그런 바지를 입은 남자와는 말도 섞지 않겠노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인기 여류작가의 소설을 읽은 기억도 있다. 그 말이 아니어도 어려 고무줄 바지를 입을 때 말고는, 허리띠를 두르지 않고 나간 적이 있을까. 참, 저번 봄날 길거리에서 허리띠가 끊어진 적이 있지. 한 칸 조여 착용해도 볼썽사납다. 그래서 쳐넣어 둔 다른 허리띠로 바꿔 매고 다니게 되었다. 여기서 나야말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도무지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 것에 대한 기대나 적응보다 이왕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못누그러뜨린다. 손에 익지 않은 허리띠에 대한 거부감 탓도 있지만 자기위안으로 눌러 겨우 참는다. 헌데 분명한 건 물건에도 성정이 있는 걸까. 명품이 아니어도 브랜드가 분명한 상품인데 얼마 되지 않아 조그만 충격에 버클 핀이 빠져버렸다. 제 구실을 못하는 허리띠. 먼젓번엔 조여서 잠그는 방법이고, 이번 건 구멍에 침을 걸어 조이는 허리띠이다 보니 둘을 합해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 주인이 싫어한다고 그렇게 망가지다니. 우스운 꼴이지만 양복에 허리띠를 매지 않고 출근했다. 그게 월요일이다. 회의도 잦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일도 시간대별로 줄줄이 엮여 있다. 일정 내내 허전한 허릿춤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한다. 편집일정을 되뇌이다가도, 인터폰으로 사람을 찾다가도, 결재를 하다가도 만지작댄다. 습관도 신앙 못지 않다. 자각 않는 사이에 행동에 규약을 둘 정도이니. 몸의 중심을 꽉 조여주는 맛이 없으니 걸음도 어지럽다. 진작 알아챈 이들이 이상하겠지만 곤혹스런 내 처지를 입에 담지 않아 다행이다. 후딱 아무거나 장만해야지. 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갈 수는 없고, 옆 재래시장을 기웃거린다. 마악 문을 여는 허름한 양품점 주인 할머니가 환대한다. 손수 허리 둘레를 재고 재단하여 걸어주는 바람에 계면쩍다. 마수걸이라 좋을 만도 하지. 싸구려여도 허릿춤을 조이자 그런 대로 견딜만하다. 새삼 습관에 매어 행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처지가 우습다.
그러고도 지금 달포째 다른 이가 매고 다니는 허리띠만 쳐다본다. 투박해도 단순하며 실용적이고 부디 직성에 맞는 걸 찾을 수 있어야 할텐데.


걸핏하면 손전화기를 교체하는 우리 아이. 젊은 세대 간에는 그게 소통의 아이콘인가. 사흘걸이로 쏟아내는 새 모델을 동경하게끔 만드는 제도나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바꾼 전화기에 대해 잔소리라도 꺼낼라치면 으레 하는 변명. 요금부담이나 기기에 대한 지불이 없다는데, 실상은 그렇치도 않다. 금방 장만한 전화기를 잃기도 하고, 그만 변기에 빠뜨렸다는 데 무슨 말을 더 할까. 굳이 하고픈 말은 결코 비용부담에 대한 게 아니다. 그렇게 애상을 바치며 치장하고 물건을 수시로 교체한다고 본질이 바뀔까 하는 점이다.
때는 스마트폰이 대세이다. 여지껏 세 자리 국번인 내 전화기야말로 아이가 열댓 번 바꾸는 동안에도 묵혀 그대로인데, 아뿔싸! 주변 너도나도 장소를 막론하고는 게임이나 중계방송, 드라마 시청은 물론 맛집이나 길찾기에도 이용하며 앉은 자리에서 인터넷 검색에 최신영화까지 다운 받아 보더라만. 그게 비싼 장난감 하나씩 든 형국이라, 제 세상에만 머물러 키득거리는 꼴이 썩 보기 싫어 나만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멀쩡한 기기가 먹통이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바꾸게 되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안타까운 건 정작 필요한 성능에 알맞은 조촐한 기기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억지춘양 격으로 비대해진 시스템이나 주어진 제도에 나를 녹여야 하는 일이 부담스럽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로 재단하면 더 슬플 수밖에.


내리쬐는 볕은 따갑지만 응달에 머문 바람은 서늘하여 맨살에 소름이 돋는다. 숲을 흔드는 바람을 보며 불현듯 지난 시간을 생각해냈다. 혼자 남은 도깨비의 서러움인가. 세상을 구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따뜻한 온기를 지닌 나로 세우고 싶었건만 이도 틀렸다. 자고나면 소리 지르며 한데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어리벙벙하게 만든다. 친구처럼 마음에 두고 있던 적요를 찾을 길은 없다. 들이닥칠 새 날에 대한 두려움이 부쩍 커지는 때이다.



















Chuck Mangione, Chidren of Sanchez





'햇빛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월함  (0) 2011.10.11
길과 영원 속  (0) 2011.09.30
어디서 와서는  (0) 2011.08.30
다음 봄날에  (0) 2011.05.25
겨울 전언  (0) 2011.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