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좋은 날 큰애가 조막만할 적, 햇빛이 하도 좋아 안고 나갔다. 베란다를 서성이는데 이웃에게 들켰다. 미소 짓던 이웃이 지나칠 수 없다는 듯 한마디 던진다. "그 집에 언제 애가 있었나요?" 바깥에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은 순둥이 큰애에 비해 작은애는 계집아이지만 성깔이 보통이 아니어서 찡그.. 햇빛마당 2010.04.01
코끼리 울음 솟대처럼 서서 우뚝한 은사시나무를 지표로 소롯길을 걷는다. 허공을 쫓아 온 햇빛이 은사시나뭇잎에서 되쏘여 산지사방으로 팔랑거리는 날개를 편다. 길이 꺾일 때마다 잠겨드는 솟대, 그걸 다시 찾으며 조급한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햇빛이 둥그렇게 모인 둔덕에서 멈췄다. 깊은 .. 햇빛마당 2010.01.28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4.19탑을 지나 아카데미하우스 정문을 비켜 선 북한산 들머리. 이름만으로도 오금 저린 칼바위로 오른다. 드러내기보다 조심스레 숨어드는 숲길. 빙폭을 품은 내를 벗삼아 오르면 어느 순간 가파르게 쳐올라야 하는 백척간두의 성. 성문을 깨고 든 점령군처럼 용의주도하게 성벽에 선다. .. 햇빛마당 2009.12.29
창 밖으로 늘상 보는 풍경은 아다지오Adagio여서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아침마다 이용하는 지하철, 일부 구간이 지상에 드러나 있어 쫓아나올 때마다 발가벗긴 것처럼 안팎이 밝아진다. 큰 산 뒤편이 붉으스레하게 물드는 동녘과 미적거리는 해와 미처 숨지 못하고 창백하게 부서지는 중천의 달. 여름 내 산야를 .. 햇빛마당 2009.09.01
따로 또 따로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에요? 느닷없이 뾰족하게 찌르는 바람에 말문이 막힌다. 빈둥거리는 것처럼 비쳤는가.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궁리하느라 바빴는데 말야. 던지는 말이 일반적이다 못해 막연하지만 농담처럼 받아서는 안되겠지. 대저 저 사람이 나열하는 내 단점이 뭐더라?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 햇빛마당 2009.08.12
여름속 드럼통에 갇혀 달아오른 여름. 바야흐로 내리막길에서 가속도를 붙이는 참이다. 퉁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닭 벼슬같은 깃을 늘어뜨린 맨드라미가 소리 죽이고 웃는다. 묵정밭에 난무하던 고추잠자리가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려다가는 자발없이 솟아올랐다. 드럼통 안이라도 꿈이야 꾸지 못할.. 햇빛마당 2009.07.28
오름 하나 만사가 생각대로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들여다 보면, 차츰 그렇게 이뤄지는게 무미건조하고 진력이 나기도 할 게다. 월말에 나온다던 녀석이 그 다음 달로 휴가가 미뤄졌다가 아예 두어 달 뒤에나 올 수 있다나. 정수리를 감싸고 낙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와중에 그렇게라도 갇힌 시.. 햇빛마당 2009.05.20
용돈이 필요해요 창경궁 초입에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처마선이 날렵한 팔작八作지붕 건물이 있다. 함인정涵仁亭인데, 영조가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안을 살펴보면 우물천정 사방을 돌아가며 툇간 보아지 사이 걸린 편액에서 도잠陶淵明의 사시四時 한 구절씩을 볼 수 있다. 春水滿四澤춘.. 햇빛마당 2009.04.25
봄 익히기 갓난 병아리처럼 부리일랑 곧추세우고 허공을 헤집는 햇살. 까치걸음으로 다니다가 몰려다니며 깐죽대더니, 풀어져 헤살 부리던 봄빛을 잡아끌어내리기도 한다. 길 가던 아주머니들이 멈추어섰다. 따따부따 수다가 길어진다. 뽀글이 갈색 머리카락을 햇살이 쪼았다. 오랜만에 정장을 하.. 햇빛마당 2009.04.02
행복하지 않나요 도깨비와 가까이 지내보라.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계속 갖다 줄 것이다. 그러다가 막판에 다다르면 꼭 도깨비는 주었던 돈을 다 내놓으라고 생떼를 부린다. 이건 도깨비의 성격 탓이므로 앞뒤를 따지고 정황을 설명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미리 이런 도깨비의 성격을 간파하고 돈으로 땅을 .. 햇빛마당 200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