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오름 하나

*garden 2009. 5. 20. 11:46




만사가 생각대로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들여다 보면, 차츰 그렇게 이뤄지는게 무미건조하고 진력이 나기도 할 게다.
월말에 나온다던 녀석이 그 다음 달로 휴가가 미뤄졌다가 아예 두어 달 뒤에나 올 수 있다나. 정수리를 감싸고 낙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와중에 그렇게라도 갇힌 시간이 지난다는 긍정의 자세라도 익히면 좋으련만.
주변이 부산한 참에 연락을 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붙이는 말이 숫제 면회라도 와 주십사고 애원이다. 그래, 안쓰럽기도 하다. 바깥 공기가 무조건 그리울 텐데.
열일 제치고 나선 휴일, 봄을 지우는 비가 산을 넘거나 터널을 드나들 때마다 오락가락한다. 센바람까지 동반하여 교각 위에선 달리는 차가 기우뚱하기도 한다. 이른 열섬현상에 익숙해져 반팔 차림으로 나선 아이는 제 오빠를 만날 기쁨보다는 맨살에 돋는 소름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덧옷을 준대도 고개를 젓는데 옆에서 피씩 웃는다. 멋을 위해선 이를 앙다물고 죽기 살기로 견디는 애가 행여 입겠느냐며.
같이 지내는 내무반원이 열한둘 뿐이라기에 임시막사를 쓰는 야전통신대대 정도를 그렸는데, 아름드리 포플러가 수백 미터나 늘어진 길을 따라 숲에 감싸인 언덕을 막아 둔 부대 정문을 보자 저으기 마음이 놓인다. 군단 사령부에 딸린 예하부대인가 보다. 주눅이 든 제 엄마와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눈치이다. 허긴 여긴 오로지 남자들 세상이니. 면회를 신청한 잠시 후에 위병소로 내려오는 일행. 멀어도 꼬물거리는 게 영락없다. 인솔해 오는 두 녀석도 그렇지. 군복도 아니고 간편복 차림으로, 휑하니 열린 공간에서 가재처럼 걸어 가까이 와서도 멋적어선 쭈볏거린다.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어 보무도 당당한 군인인 줄 알았더니, 낯가림이 이리도 가셔지지 않아서야.


면회소에서만 가능한 조우. 아쉽지만 부대 안과 밖 공기는 질적으로 다르다. 녀석 입이 함지박만하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를 뇌까리며. 오랜만에 보는 식구도 반갑고 걸리는 게 없어 유쾌하다. 한 번씩 아이들이 부쩍 자란 느낌이 드는 데 바로 지금이 그렇다. 우려한 만큼 심각해 보이지도 않고. 마련해 간 게 없는지라 배달음식을 사정없이 주문한다.
그걸 누가 다 먹나?
이 정도야 얘가 충분히 해치울 텐데.
반입이 어렵다지만 저쪽 상급자 편에 일부를 들여 보내요. 소대원들이 먹을 수 있게. 여긴 먹을 만큼만 남기고.
먹고 싶다던 피자라든지 자장면, 통닭에 가져오면 안된다는 생맥주까지 싣고 들락날락하는 오토바이. 근데 중국음식을 가져오면서 수저를 하나도 안들고 오다니, 음식을 앞에 두고 퉁퉁 불어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화가 난다. 나쁜 녀석들. 그래도 녀석이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얼굴이 좀 탔다만 너 아주 편한가 보구나.
에이, 말씀도 마세요. 눈 뜨면 생각 없이 지내야 하는 현실이 암담해 한숨만 나요.
일과중에 하는 일이 뭐냐?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말뚝을 치거나 박는 일만 되풀이해요. 휴일은 쉬거나 티브이를 시청하고.
정말 군대 좋다. 인터넷을 하지 않나, 노래방이 있질 않나. 그런 일이라면 나도 하겠다.
차암, 엄마도. 그게 예삿일이 아네요. 말뚝 하나 치고나면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에요.
그러고 보니 땀이 배어 있는지 냄새가 나. 빨래는 해서 입는 거냐?
직접 하기도 하고 상병 이상 되면 드럼세탁기도 써요.
드럼세탁기까지? 차라리 말뚝 박고 군에 계속 있어. 그렇찮아도 밖에 나오면 힘들어.
참 나, 의무를 채우는 것만 해도 벅찬데 그건 너무해요.
아냐, 넌 군에서 정신무장이 확실히 되어야 해. 기왕 하는거 해병대에나 보내는 건데.
엄마나 동생이 부대에서 일주일만 지내봐요. 아마 매일 울 걸요. 이거 못할 짓이에요.
맞아. 얘는 지금 해병대에 있는 것만큼 힘들어. 괜히 말로라도 속을 긁지마.


아빠의 군대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하다는 녀석. 조금씩 앞과 뒤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현실을 탓하는 와중에도 몸을 추스르는 모습이 보인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루고 싶어도 바로 몰입해야 하는 일도 있다. 물론 닥치면 하게 되어 있지만 일에 임하는 자세가 문제이다. 무작정 몸으로 때우더라도 그런 과정중에 좀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기도 할 게다. 젊어 고생이야 사서도 한댔는데. 잠시 걸음을 멈춘들 어떠냐. 멀리 뛰기 위해 개구리는 더욱 몸을 움츠리지 않더냐. 그게 살이의 나침반으로, 자양분으로 작용하여 진로를 수정하고 쉼없이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비 그치면 숲은 더욱 풍성해지고 초록을 짙게 만들 듯, 아직은 부모라는 언덕에 기대 골라주는 깃을 나른하게 즐기는 너이지만 조만간 나침반 없는 창공에서 홀로 방향을 찾으며 날아가야 할 게다. 암울하다고 여긴 지금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외려 그러한 과정이 꼭 필요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날이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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