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병아리처럼 부리일랑 곧추세우고 허공을 헤집는 햇살. 까치걸음으로 다니다가 몰려다니며 깐죽대더니, 풀어져 헤살 부리던 봄빛을 잡아끌어내리기도 한다. 길 가던 아주머니들이 멈추어섰다. 따따부따 수다가 길어진다. 뽀글이 갈색 머리카락을 햇살이 쪼았다. 오랜만에 정장을 하고 나왔더니 팽팽한 둔부가 머쓱하여 쓰다듬었다. 납딱 엎드렸던 입자가 투두둑 떨어진다. 키가 작달막한 아주머니가 얘기를 나누다 말고 황홀한 표정이다. 눈이 게슴츠레하게 감긴다.
진통제로 나긋나긋한 잠 한자락을 붙잡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달짝이는 입술. 운신이 어려운 육신은 딱딱하고 눌린 영혼은 답답하다. 제풀에 잦아드는 말을 굳이 새겨듣지 않았다. 짐작만으로 창 밖 허공을 더듬는 눈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생전 간절한 것이 무엇이던가. 한번은 꼭 다녀가고픈 곳이 있을까. 벼랑에 서서 떠올리는 얼굴은 과연 누구일까를 마음속에 짚으면서.
병실 창을 열자 억센 바람이 발을 디민다. 저만큼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 함성이 올랐다. 잎도 없이 감감한 가지에서 참새떼가 날아올랐다. 겨울 끝 무렵 날이 무딘 바람이 사지를 푸근하게 만들더니, 봄날이 어찌 이리 사나울까. 억눌린 겨울이 잦아들 때마다 깨어난 숨을 이으며 꽃이 기침을 한다. 쪼그라들어 화석처럼 침대에 붙은 몸도 들썩인다. 바람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구나. 얼른 창을 닫았다.
묵묵히 걸었다. 바람이 가지를 어루만지는 소나무 숲에 닿을 때까지. 바라던 않던 간에 아직 길에서 길을 더듬는 이들. 지하도를 나와 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누군가 바짓단을 잡는다. 어쩐 일인가 했더니, 앉은뱅이 걸인이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고서 헤헤거린다. 더러 옹이가 박혀도 품어 삭이며 구부러진 채 지양성을 보이는 나무들처럼 그렇게 고개를 쳐들며.
'무의식은 자아가 한계에 부닥치도록 하기 위해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갈등을 바란다'고 융이 말했던가. 매화가 하얀 별들을 이고 큰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면서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여겼는데. 때아니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바람의 뒤척임이 심한 밤이 지나고서야 이 해의 살구나무 꽃이 피었다. 지천에 깔린 지난 가을 마른 낙엽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현호색 무리도 만났다.
꽃 옆에서 꽃보다 더 환한 웃음을 보이던 당신. 삶을 떠올리면서 죽음을 궁글리기가 힘들었는데. 낯설어도 계절의 바뀜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을.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들에게 행여 흠이 될까봐 재가도 않고 지킨 오랜 성상들. 인제 겨울 자취처럼 흩이고 자물어 들어야지.
꽃처럼 자란 아이들이 대견타. 봄날을 달구던 꽃도 스스로 탯줄을 끊어 사그라들 게다. 또 다른 초대를 위하여, 어느 때 툭 떨어져야만 하는 꽃처럼 가야지. 나무에 귀를 대면 들릴 박동. 생명의 상징처럼 마음 닮은 살구가 주렁주렁 열릴 즈음에 누가 상큼한 열매를 깨물어 이 얼굴을 기억이나 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