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탑을 지나 아카데미하우스 정문을 비켜 선 북한산 들머리. 이름만으로도 오금 저린 칼바위로 오른다. 드러내기보다 조심스레 숨어드는 숲길. 빙폭을 품은 내를 벗삼아 오르면 어느 순간 가파르게 쳐올라야 하는 백척간두의 성. 성문을 깨고 든 점령군처럼 용의주도하게 성벽에 선다. 그 아슬아슬한 너머 보이는 사람 사는 세상, 한숨이 절로 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에 차지 않아 버럭 소리 지르기도 하고 쫓고 쫓기며 내달리던 아수라장. 그 안에서 견딘 시간이 꿈이었던가. 할 수만 있다면 꽉 닫힌 상자에 구겨 넣고 동여 매야지.
구불구불한 강심을 지치며 하얗게 벼린 겨울바람이 떠오른다. 확장된 북서쪽 찬 대륙성고기압에서 비롯되어 아득한 사막을 건너고, 낮은 저지대 눈밭을 쓸고, 사금파리 꽂힌 담장이 늘어선 골목을 훑고, 종종걸음치는 인파를 떠밀었다가 사방 우뚝한 빌딩 사이를 지나 산등성이 빽빽한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몰려온다. 눈먼 마귀할멈의 손톱질이 이럴까. 카르릉대며 방향도 없이 할켜 거푸집처럼 흔들리는 삐죽빼죽한 청석군. 날숨이 체외로 뱉어지는 순간 얼어버리는지, 막힌 수채 구멍처럼 기도가 맹맹하다. 우쭐함은 커녕 위태로움이 가중되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세우려고 억지로 발에 힘을 주었다.
한 스무 해 전의 겨울날, 여기 오른 적 있다. 세상에 나밖에 없어 주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몸뚱아리 하나만으로도 만만하던 시절. 사지를 똘똘 말고는 발 아래를 내려다 본다. 휘청거려 눈을 감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렇게 있으면 바위와 함께 구를 것만 같았다. 짓찧고 부딪쳐 쪼개지고 가라앉으며 닳으면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어름사니처럼 위태위태하게 세월의 끈을 닫고 건넜다. 이편에서 보면, 철 없는 사내 하나가 좌충우돌하는 게 뻔히 보인다. 계곡을 올라 전우치처럼 날아야만 하는 뜀바위를 내려가거나 다리를 벌리고서는 고래등바위나 말등바위 등에 겁없이 붙어 있기도 한다.
세월이 많은 것을 알려 주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형상을 잡아 떠올릴 것도 같다.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길이 아닌 곳으로 재촉하던 발걸음. 사랑만을 되뇌며 사랑 없이 지난 메마른 통로. 다가서려 하면서도 외려 간극을 벌려 멀어진 사람과의 관계. 경계 없는 곳을 구획하여 말뚝을 치고 울타리를 세운 일. 벽으로 막아 눈을 가리고 들어앉으려고만 했다. 어제의 내가 어떠했던가. 축 늘어뜨린 어깨, 물먹은 솜처럼 주눅 들어 가라앉았지. 한 줄 참회록을 작성하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맞는 시간. 내다보면 곧추 세워진 창검에 숨이 막힌다. 다시 헤쳐 나아가야 하나. 오늘은 어제와 사뭇 다르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
새삼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방기하여 다독이지 못한 영혼, 인색함을 지우고 스스로에게 박수라도 한번 보내야 하지 않을까.
Only Our Rivers Run Free * James Last O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