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코끼리 울음

*garden 2010. 1. 28. 11:22





솟대처럼 서서 우뚝한 은사시나무를 지표로 소롯길을 걷는다. 허공을 쫓아 온 햇빛이 은사시나뭇잎에서 되쏘여 산지사방으로 팔랑거리는 날개를 편다. 길이 꺾일 때마다 잠겨드는 솟대, 그걸 다시 찾으며 조급한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햇빛이 둥그렇게 모인 둔덕에서 멈췄다.
깊은 해자를 울타리로 한 우리에서 어슬렁거리는 무료한 몸짓. 동물원 코끼리가 한여름 뙤약볕을 쬐며, 한무더기 아이들 앞에 있었다. 음식물이나 돌 등을 함부로 던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는 걸 보면 코끼리가 장난거리이기도 한가 보다.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거구가 어찌 이리도 하찮아졌을까. 위엄이나 존경 대신 재주 아닌 재주로 조롱을 받고 견디는 게. 드넓은 초원을 밟고 자랑스러워야 할 몸집이 하필이면 삭막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 그늘막에서 겨우 존재를 남겨 거들먹거리고 있어야 하는지. 푸른 들에 싱싱한 몸을 비비며 신선한 초목을 우걱우걱 씹기보다는 단내나는 비스킷 조각으로 어찌 견디는지 궁금하다. 심각함을 받아들이는 건 어쩌면 이 치들에게서 비껴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야생 코끼리들이야말로 알게 모르게 사지의 벼랑에 몰려 절박하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거대한 몸집과 기둥처럼 튼튼한 다리를 지탱하려면 예사 부지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부채같은 귀를 흔들어 바람을 센다. 긴 코를 휘둘러 한올의 풀 냄새라도 기어이 맡으려고 애쓴다.
제주 회천동 코끼리랜드에 있는 코끼리들은 비교적 몸집이 작고 어린 데도 불구하고, 하루 먹이로 해치우는 건초량이 일백 킬로그램은 된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환산해 비교하면, 몸무게가 칠천오백 킬로그램에서 수 톤까지 나가는 아프리카코끼리들은 대체 얼마를 먹어야 할까. 초지를 찾아 쉴새없이 옮겨 다니지만 서식지 파괴와 사람들의 자연 개발에다가 상아 거래를 위한 밀렵 등으로 생존한계지수가 위험선에서 간당거린다. 조만간 우리는 기억 속 한때의 동물로 코끼리를 생각해낼지도 모른다.


가끔 함께 움직이는 산행팀. 다녀오면 어김없이 술로 곤죽이 되기가 예사이니. 이른 아침, 배낭을 챙겨 떠날 채비라도 할라치면 옆에선 질색한다. 노골적으로 흰자위를 드러내 흘길 정도로. 어떡하랴, 이미 약속은 잡혀 있고 그렇게 다녀오는 걸 그나마 위안으로 받아들이려니. 떠나고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한줌 삶의 가치라도 찾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새벽길을 종종걸음치면서 여름날의 애처러운 코끼리 울음소리를 기억해냈다. 한손에 풍선을 들고 안겨 있던 계집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제 엄마 품에 얼굴을 묻었다. 코끼리가 무료하게 코를 쳐들며 애처러운 울음 소리를 다시 냈다. 보고 있던 조무래기들이 깔깔 웃었다.
국민학교 때 한반이던 연경이. 또래보다 덩치가 커 느릿느릿하고 뒤뚱거렸다. 코가 커서 별명이 코끼리였는데, 동무가 별명을 부르면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찔끔거린다. 전할 말이 있었는데 복도에서 연경이와 마주쳤다. 무심코 별명으로 부르는데 돌아보는 눈이 슬프다. '아차' 하던 차에 다가온 연경이. 주저주저하며 조그맣게 더듬거린다. 이름으로 불러 주면 좋겠다는데, 오물거리는 걔 입 모양을 멍청하니 보며 서있었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고 싶다.
황소 떼처럼 몰려다니는 바람. 겨울산에서는 송곳처럼 뾰족한 침이나 날을 세워 맨살을 저민다. 물 먹은 습자지처럼 살갗이 너덜너덜해져 찢어질까 우려할 정도로. 등성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자 어지럽다. 발 끝에 힘을 주고 몸을 세울 때 낯익은 코끼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주저앉은 산이 우르릉댄다. 복도 한켠에 웅크리고 앉은 연경이는, 일어설 줄 모르는 채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Magic of the Greek Bouzo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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