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마당

겨울 나그네

*garden 2011. 1. 26. 16:56




때가 되면 친구처럼 달라 붙는 불청객. 감기로 한 며칠 맹맹하더라니, 오늘에야 썩 괜찮다. 우선 후각이 예민해졌다. 코에서 정수리 쪽으로 통로가 난 듯 훤한 기분이다. 제과점을 지나며 매장을 정리하는 아주머니의 건강한 웃음을 보았다. 잘부르는 노래라도 흥얼거리는 걸까. 부풀어오르는 빵 냄새가 솔솔 쫓아 나왔다. 식빵 모양의 흰 두건을 쓴 제빵사는 보이지 않는다. 안쪽에서 생크림을 믹싱하는지도 모르지.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맡는 별의 별 냄새. 알짱거리다가 뒤에 쳐진 단발머리 아가씨를 돌아다 봤다. 빨강색 털모자와 목도리가 잘어울린다. 오데코롱 향이 그윽하여 눈치 못채게 킁킁댄다. 신문을 읽는데 옆자리에 잽싸게 주저앉는 아주머니에게서 불현듯 맡는 고구마 냄새. 화장기 없는 말간 표정을 곁눈질하다가 옆집에 살던 금순이도 떠올리고 아랫방에 세들어 살던 후덕한 순덕이 아주머니도 생각해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꽁꽁 언 화단 한쪽에 김칫독을 쟁여 두었다. 끔찍하던 추위를 가로질러 가서는 구부리고 뚜껑을 여닫던 엄마를 보면 시큼한 김장 김치 냄새가 절로 진동한다. 점심 끼니로 떼우는 살얼음 덮힌 동치미와 이빠진 사발에 담긴 찐 고구마들. 노릇한 속살을 할짝거리며 베어먹을 적이면 막 앞니를 갈던 동생들 표정이 우스워 견딜 수 없다. 누더기였어도 두툼하던 무명옷에 감싸여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싶던 나는, 혼잣날 작정을 하고 서너 개의 신작로를 넘어 쇠냄새가 깔린 철길변에 나앉았다. 지난 계절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하던 덤불이 주저앉아서는 을씨년스럽게 철길을 지킨다. 열차 칸을 사십여 개나 달고선 힘겹게 증기를 내뿜으며 기어가던 화물열차를 피해 달아났다가 불나비처럼 쫓아 들어서는 엎드려 귀 대고 듣던 먼 지방의 기척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다 아름다울 것 같았다. 소실점으로 끝나는 막연한 철길 저쪽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발돋움하여 휘황한 바람이 지쳐가는 곳을 그립게 보았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멀리 떠나 봐야지. 그래서 세상 저편으로 이어진 강과 호수, 벌판이나 사막, 구릉의 연속과 자작나무 숲까지도 샅샅이 살펴볼거야.


늘상 떠나는 일상을 꿈꾸었다. 바람이 지날 적이면 존재감을 되새기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가득 펼쳐진 산그리메를 헤아렸다. 빈 가슴 안을 철컥철컥 밤새 지나던 기차. 횡행하는 철길의 교차점에서 떠올리는 오래 된 기억.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저곳으로 헤매다 보면 돌아갈 길이 막연했다. 이번에도 오지 못하겠느냐고 조심스레 운을 떼는 엄마. 사랑한 기억마저 낯설어져 인제사 지난 날의 냄새는 왜 떠오르지 않는걸까.
참나, 늘 계시던 자리를 비우고는. 오디십미껴?
















Only Our Rivers Run Free
* James Last 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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