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호경이가 내는 탄성. 별 일이다. 수업시간 중에 창 밖에 눈길을 주고서는.
'비 오네.'
감정표현이 좀체 없는 아이인데 말야. 어떤 때 눈을 들여다 보면 순진한 아이 같고, 행동거지를 보면 노인네처럼 의젓하여 어리둥절한 때가 많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행세해 아이들이 놀리기도 한다. 헌데 저렇듯 촉촉한 목소리를 내다니.
'비가 뭐 그리 좋노?'
퉁명스레 윽박질러도 개의치 않았다. 옆모습으로 보이는 속눈썹이 길다. 빵처럼 부푼 뺨 너머 막 시작한 거센 빗줄기와 함석지붕을 때리는 아득한 소리의 향연. 시원한 바람이 훅 끼쳤다. 순식간에 운동장 곳곳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진다. 우산을 갖고 올 걸. 집에 가는 게 걱정이다. 섬뜩한 빗줄기가 목덜미에 닿은 듯 움찔한다. 챙길래도 우산이 있어야지. 신발장 위에 둔 겨우 한둘 뿐인 우산을 냉큼 차지할 수야 없다.
컴컴하고 습기 찬 복도 현관이 시끌벅쩍하다. 아이들이 어수선함이 궁금해 목을 뺀다. 발 빠른 말이 먼저 도착했다. 옆반 태식이가 고무신을 잃었다고. 신발이 혼자 걸어 나갔을 리도 없다. 하필이면 이런 날 신을 잃다니. 행여나 하며 샅샅이 찾아도 소용 없다. 착각하고 신고 갔을까, 혹은 알고서 그랬을까. 눈물이 글썽글썽한 태식이는 혹시라도 제 신발이 보일까 하여 혼잡한 틈에서 지나는 이들 발만 쳐다보고 있다.
물자가 귀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잃어버리면 아찔하다. 잃지 않으려고, 잃어도 찾을 수 있게 하려고 일단 물건에 자기 이름부터 써 놓았다. 이름표로도 말을 하는 물건들. 이명자나 신영숙은 조그맣다. 김정기는 거기 비하면 아주 크다. 이천식, 경혜, 미희, 순철이는 동글동글하거나 삐뚤빼뚤하다.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오게 되었다. 따라온 동생이 거들어 준다고 자기도 몇 권을 나눠들었다. 의외로 무겁다. 자세를 잡던 동생이 책을 떨어뜨렸다. 흙탕물에 책이 엉망이 되었다. 동생이 울상을 짓든 말든 노려본다. 책을 빼았았다. 화가 나 참을 수 없다. 그만 풀이 죽어 따라오는 동생. 숨소리도 내지 않아 측은하다. 돌아보고 마음을 열려고 했으나 도무지 되지 않았다. 차츰 흙탕물이 마음에까지 번진다.
물건은 만든 사람의 정성과 혼이 배어 있는기라.
함부로 대해서 안되지. 잠시 내게 맡겨져 있는 물건들. 어머니는 내가 쓰는 것들이 동생에게 전해지고 그렇게 쓰여지기를 바란다. 온전한 채 지니고 싶어도 오래 쓰면 낡고 해지는 게 당연하다. 그게 송구스럽다. 내 잘못도 아닌데.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 등을 삼간다. 옷도 마찬가지. 계절 내내 단벌 옷으로만 버텨 때에 절거나 탈이 나는 걸 막을 수 없다.
다시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인제는 물건이 주변에 넘쳐 탈이다. 살며 배우고 익힌 습관이 무색하여 당황스럽다. 은연중 동시대의 친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 보면 안타깝다. 조만간 우리는 막간에서 어정쩡하게 허둥거리다가 가차없이 버려질 참이다.
Hideo Utsugi, From The Northern Country. e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