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파인 본부장, 수틀리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허튼짓을 하거나 어물거리는 게 보이기라도 하면 얄짤없다. 부르면 지옥 끝에서라도 달려오는 추종자가 몇 있다. 그 외에는 모두 적이다.
일이 있어 본부장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이건 다른 분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오디오 박스에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가끔 듣는다는 반야심경을 꺼낸다. 주섬주섬 찾아 끼운 다른 테이프에서 '김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위시한 드라이빙 뮤직이 이어졌다. 신 나게 달리는 중인데, 아차! 신호등 바뀐 사거리를 그냥 넘어 버렸다. 별 일 없으면 다행인데, 숨어있었던 듯 경찰이 나와서 손짓한다. 그리고 딱지를 끊었다. 깍듯한 경례를 받으며 우왁스럽게 차를 출발시키는 본부장, 입에서 걸죽한 쌍욕이 거침없이 나온다.
"하필 거기를 지키고 있다니. 가는 길도 먼 데 액땜으로 치부하시지요."
분위기를 바꿀 겸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도 화를 참지 못한다.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아 멧돼지처럼 '씩씩'댄다. 조금 전까지 호기롭던 목소리가 어눌할 정도이니. 시흥대로 한가운데를 성질대로 달리는데, 이번에는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따라와서는 세우란다. 엉?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스전용차선 위반'이라는 경찰 아저씨는 아직 파릇파릇하다. 이것 봐라.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 버럭 소리 지른다.
"다인승차량이 통용되는 차로 아니오?"
갤로퍼에 지금 여섯 명이 빽빽하게 앉아있었는데.
"여기서는 적용 안됩니다."
방금 전 딱지를 끊은 다음 중앙으로 슬슬 차를 몰기에 막으려다가 참았다. 설마 그 정도 이성이야 없을라구. '목에 칼이 들어도 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상대가 누구든 아랑곳없이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맞받은 경찰이 매정하게 딱지를 날린다. 그야 돌아서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야말로 큰일났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차내 분위기. 냉방을 너무 세게 틀어 놓았나. 아니다, 앞자리에 앉은 이야 맨살에 소름이 돋을 정도이지만 뒷자리에 앉은 이들은 목덜미 땀을 훔쳐내기에 바쁘다. 위안은 하나뿐,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도 그 팽팽함이 깨어지지 않는 것에 차라리 안도하는 것이다. 늘 좋을 수야 없지. 허나 안좋기만 할 수도 없다. 차가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길로 들어선다. 커다란 나무와 담벼락을 가리지 않고 덮은 꽃들로 눈이 환하다. 한여름 무더위를 즐기듯 고개 쳐든 주황색 나팔. 입맛을 다시며 본부장이 입을 뗀다.
"저게 무슨 꽃입니까?"
약속이나 한듯 다들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더위와 맹렬한 햇볕. 지친 오후 속을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던 아낙네 두엇이 조막걸음으로 찾아든 그늘. 지치고 찌든 그녀들 얼굴 위 늘어뜨려진 꽃들이 주렁주렁하다.
"능소화네요."
"아, 저게 능소화입니까?"
차내에 화색이 돈다. 누군가 참았던 숨을 내쉰다. 비로소 사람들이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얼마 전 예식장에서 본부장을 만났다. 예전 서슬 퍼런 본부장이 아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건강하시지요!"
"아이고, 우리 똑같이 늙어가네요. 나야 이제 일흔을 넘어 버렸으니, 보다시피 온통 틀니를 해서, 말 그대로 '이빨 빠진 호랑이'입니다."
"그래도 시골 햇볕에 그을었을 뿐이지 좋아 보입니다."
능소화는,
여름꽃으로 가을까지 피고지기를 거듭한다. 주로 남쪽 지방에서 피던 게 지금은 서울이나 경기 이북쪽에서도 심심찮게 보인다. 나팔 모양의 작은 꽃은 동백꽃처럼 통째로 떨어진다. 정원이 있는 집 화단 등에서만 보이던 꽃이라 정갈하지만 화려한 듯 느껴진다. 능소화를 주제로 한 소설도 있다. 능소화 꽃가루에 갈고리가 들어있어서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Rogier Van Gaal, Miracle Of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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