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고향인가. 이정미는 앞서 길을 걸은 어머니, 아버지의 얘기를 했다. 눈에 물기가 어린다. 허긴 부모의 삶과 인생 굴곡에 대해 애틋함을 느낄 나이이다. 김덕영은 그 길의 어느 곳에서 시작되어 파생된 역사적 사건을 나열했다. 정종택은 걷는 중에 볼 만한 경관과 풀꽃, 사람들의 모습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었다. 두런거리며 걷다가도 사람들은 어느 때 말을 끊었다. 철 지난 벌레 울음소리나 산새가 후드득대는 소리,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길과 꽃이 열리고 열매가 단단해지는 기미를 느끼기도 한다. 키다리 소나무가 건들거린다. 숲 가득 안개가 떠돌았다. 허공중에 발을 딛듯 몽롱하게 걸었다. 혹시 숲 안 어딘가 백 년 동안 잠든 공주가 머문 성이라도 나타난다면. 사방에 거미가 천라지망을 쳐놓고 먹잇감이 걸리기만을 기다렸다. 그게 성가시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말없는 풀이 어깨를 곁고 하늘까지 가린 길. 낫을 든 강선생이 앞서가며 허리께를 넘는 풀을 베어 넘어뜨렸다. 야생인 숲을 지치는 내내 아련한 초록 세상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숲 향기에 취해 날 세운 빗장이 풀렸다. 몸은 지칠수록 마음은 맑아지고 풋풋해졌다. 차츰 입가에 풀풀 달리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마을 가까운 언덕배기 아래로 구른 박덩이를 보았다.
'정말 큰 박이구나!'
김상철 선생이 허리를 굽혀 무거운 박을 든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간절히 바라던 '대박'이 그거라며 깔깔거렸다. 여기가 거인국인가. 산더미 만한 박 크기에 깜짝 놀랐는데, 어릴 적 우물가 빨간 다라에 뛰워 놓았던 커다란 바가지를 떠올렸다.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느새 우리는 작고 미세한 것에 익숙해져 성정도 쪼잔해져 버렸는지 모른다.
구불구불한 길을 펴는 걸 곳곳에서 보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안전하게 가려고 예전 길을 직선화한다. 산이 있으면 뚫고 내가 나타나면 다리를 놓아 잇는다. 노란 네온사인을 반짝이며 성업중이던 주유소는 난데없이 새로 난 길을 놔두고 저만큼 을씨년스레 팽개쳐졌다.
소통이자 위안인 길. 우리가 길에 나서는 까닭이지 않은가. 내버려두면 길은 길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힘겹게 오르내리던 보부상이나 괴나리봇짐을 진 이들이 발견하고 쫓아가던 주막은 이제 흔적 없다. 구성진 주모의 노랫가락도 들을 수 없다. 낭창하게 멋들어지게 휘어져가던 시간마저 사그라져 버렸다. 언젠가 마음속에 그어둔 길을 떠올렸다. 길이 아닌 길에서 길을 찾으려고 서성이던 날들. 오르고 돌아가며 쫓아내리다가 꺾인 옛길에서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낯설다. 어제를 딛고 일어선 오늘, 오늘 위에 다시 내일이 와 덮을 게다. 옛날을 찾아 되살려내고 싶은 사람들. 호젓하게 길에 서고 싶은 이들이 복구하는 길을 다녀온 다음에는 옛사람처럼 구부정하게 변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Phil Coulter , Lake Of Shad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