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니가 여기 앉아 있노?'
'선생님이 인자 요가 내 자리래.'
새 짝이 된 복순이. 일찍 등교해서는 내 옆자리에 앉아 시침뗀다. 눈을 깜박이면 긴 속눈썹이 인형 같다. 코 밑에 있는 복점과 하얀 살결이 어울려 배시시 웃으면 예쁘다. 조신하여 말도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우선 책상 중간에 금을 긋고는 넘어오면 안된다며 확실하게 당부한다. 나야말로 대범하게 지나쳐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시시콜콜 시비로 신경을 긁는다. 어느덧 데면데면한 내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저 혼자 입을 삐죽이기 일쑤다.
'가시나가 자꾸 귀찮게 하잖아!'
학교에서의 일을 듣고 어머니는 피식 웃었다.
'그건 가가 니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잖아. 그런 때는 더 잘해 줘야 하능기라.'
이종동생인 정주나 은주도 그렇다. 시골에 가면 함께 어울려 좋기는 한데,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한다.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조르다가 수틀리면 할머니에게 쫓아간다. 사정을 알아보기도 전에 기차 화통 같은 소리부터 내는 할머니. 오후 한나절 대청마루 그늘에 들어가 졸던 삽살개가 화들짝 놀라 쫓아나올 정도로 온 집 안이 들썩인다. 되도록 눈에 띄지 말아야 할 때 씨근벌떡 쫓아가는 곳이 바로 사랑채이다.
박명에 뿌연 사랑방의 미닫이문. 아궁이에 오래 불을 넣지 않아 냉랭한 바닥과 허공에 뜬 육중한 서까래를 익숙하게 본다. 재인 시간들이 기웃거린다. 들어서면 맡게 되는 오래된 책 냄새와 낡은 벽지가 어우러진 쾨쾨함도 좋다. 여기야말로 오직 남자만의 공간이므로 집안 여자들은 얼씬하지 않았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사랑채를 둘러싼 대나무 숲이 한꺼번에 출렁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걸 저렇듯 내내 상기시키다니. 그래도 묵직해 흩어지지 않는 믿음직한 주변 어스름. 더러 할아버지가 우리를 올망졸망 앉히고 한자를 가르쳤다. 음과 훈을 외워 놓지 않으면 역정이 나 장죽으로 놋쇠 화로를 두드렸는데, 무거우면서도 날뛰는 소리가 '땅땅'거리며 허공에 떠돌아다녔다. 구석구석의 어둠이 떨려 나오기도 했다.
연로하신 어른들을 도회처 외삼촌네가 모시게 되자 그나마 쫓아갈 수 있던 시골이 없어졌다. 이맘때면 산 속에 들어앉은 외딴 마을과 초록으로 진저리쳐지는 세상과 종일 소쩍새의 울음소리로 더욱 호젓하던 막막함과 사랑채의 그 정적을 찾아가는 길을 떠올리고는 조갈증에 걸린 환자처럼 허겁지겁 쫓아갔다. 먼지 앉은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가 일부러 허리를 굽혀 이를 흩뜨러 놓는다.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마룻바닥. 발 아래 삐걱이는 대청귀신이 금방 달라붙었다. 동그란 쇠 문고리를 힘 주어 잡자, 들린다!
'쿨럭쿨럭' 안으로 잦아드는 기침소리를 삼키면서도 할아버지가 장죽을 '뻑뻑' 빨아대는 시늉이.
John Adorney, When Will I See You Again